오다 노부타다의 사망
혼노지가 불타던 같은 새벽, 교토의 또 다른 자리에서도 화염이 솟았다. 니조고쇼(二条御所). 노부나가의 장자이자 공식 후계자였던 오다 노부타다(織田信忠) — 만 25세 — 가 그날 새벽 끌려가 농성하게 된 궁전이었다.
노부타다는 본래 혼노지에서 그리 멀지 않은 일련종 사찰 묘카쿠지(妙覚寺) — 그가 교토 체류 시 자주 묵던 곳 — 에 머물고 있었다. 변이 일어난 새벽, 절 쪽에서 함성과 총소리가 들려오자 그는 아버지가 포위된 자리로 곧장 합류하려 했다. 그러나 그가 도성 안에서 움직이기 시작한 시점에 혼노지 일대는 이미 미쓰히데의 본대에 의해 사방으로 막혀 있었다. 합류는 불가능했고 도주할 길도 같은 군대에 막혀 있었다. 그는 가까운 니조고쇼로 발길을 돌려 그곳을 거점으로 농성을 결정했다.

니조고쇼는 본래 무로마치 쇼군 거처에서 출발한 건물이었지만, 1579년 노부나가가 황실에 헌상한 이후로는 황태자 사네히토 친왕(誠仁親王)의 어소로 사용되고 있었다. 노부타다가 그곳을 택한 데에는 그 자리를 미쓰히데가 함부로 칠 수 없으리라는 계산도 깔려 있었다 — 황실 시설을 군대로 포위하는 일은 정치적 무게가 다른 일이었다.
그러나 그 계산은 오래가지 못했다. 사네히토 친왕은 미쓰히데 측에 양해를 구하고 가족과 시녀들을 데리고 어소를 빠져나갔고, 미쓰히데는 황실 인물이 다 빠질 때까지 기다린 후에야 본격 포위에 들어갔다. 그 사이 노부타다는 약 500명의 가신과 함께 궁전을 바리케이드로 막고 두세 시간 항전했고, 곧 화재가 옮겨붙었다. 그도 결국 그 안에서 할복했다.
같은 날 아침, 일본의 1인자와 그 후계자가 불 안에서 사라졌다. 미쓰히데의 거사는 성공한 듯 보였지만 문제는 거기서부터였다.

천황을 만나러 가다
6월 2일 오후, 미쓰히데는 교토와 오미 일대를 손에 쥔 사람이 됐다. 노부나가가 평생 쌓아 올린 영지의 한복판이었고, 잠깐 동안은 천하의 무게가 그의 자리에 옮겨 와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군 배치도, 추격 명령도 아니었다. 그는 오기마치 천황(正親町天皇)에게 사자를 보내 알현을 청했다.
무로마치 시대 이후 일본의 권력자는 이 의례를 빠뜨린 적이 없었다. 진정한 통치자가 되려면 천황의 인정이 필요했고, 노부나가도 그 절차를 거쳤으며, 그 이전의 모든 권력자도 마찬가지였다. 미쓰히데는 그 관행을 그대로 따른 것이다. 그러나 천황 측의 응답은 신중했다. 사자는 받아들여졌고 진상물도 거부되지 않았으나, 공식 인정은 끝내 유보됐다. 황실은 이 판세가 어디로 흐를지 보고 있었다.

답이 없는 편지들
6월 2일부터 6일에 걸쳐 미쓰히데는 전국의 주요 다이묘들에게 대량의 서신을 띄웠다. 내용은 일관됐다. 노부나가는 폭군이었다, 나의 거사는 정의다, 함께 새로운 질서를 만들자. 답장은 거의 오지 않았다. 침묵 자체보다 더 무서운 것은, 그 침묵이 우연이 아니라 모두가 같은 방향으로 발을 멈추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가장 충격적인 응답은 명확한 거절의 형태로 왔다. 호소카와 후지타카(細川藤孝)가 머리를 깎고 출가한 것이다. 후지타카는 미쓰히데의 사돈이자 30년 가까운 동료였고, 노부나가의 시대를 함께 살아낸 전장의 친구였으며, 와카(和歌)와 다도를 함께 즐기던 벗이었다. 두 사람은 노부나가 휘하에서 같은 시기 두각을 드러냈고 두 가문은 사돈으로 묶였다. 미쓰히데가 답장을 가장 기다린 사람이 후지타카였다면, 미쓰히데를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던 사람도 그였다.
후지타카의 거부는 원한 때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이해와 편듦의 차이였다. 그는 아마도 미쓰히데의 마음을 누구보다 가까이서 이해했을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더 분명하게 거절해야 했을 것이다. 머리를 깎는다는 결정은 감정의 발로가 아니라 일종의 철학적 선언이었다 — 속세의 일에 더 이상 관여하지 않겠다는, 답할 자격이 없는 사람이 되겠다는, 이 거사에 편을 들 수 없다는, 단순히 못 한다가 아니라 해서는 안 된다는 자기 한계의 선언이었다.

후지타카의 아들 호소카와 타다오키(細川忠興)는 미쓰히데의 딸인 자기 아내 가라샤(細川ガラシャ)를 단고의 산골에 유폐해 인연을 끊는 모양을 만들었다. 주군의 시해에 응답하는 것은 같은 죄인이 되는 일이었다. 답장 한 통으로도 후일 처벌의 근거가 될 수 있었고, 침묵만이 살 길이었다. 가장 가까이서 이해한 사람의 가장 또렷한 거절이 미쓰히데가 받은 가장 잔인한 답이 됐다.

13일천하
6월 2일부터 13일까지 — 그것이 미쓰히데 정권의 전부였다. 실제 경과는 열하루 남짓이지만, 후대 일본어에 굳어진 표현 “삼일천하(三日天下)”는 이 짧은 권력을 상징하는 이름이 되었다. 여기서 ‘삼일’은 정확한 날짜가 아니라, 눈 깜짝할 사이에 끝난 권력을 뜻하는 관용적 표현이다.
그 열하루 남짓 동안 미쓰히데는 멈추지 않고 무언가를 했다. 다이묘들에게서 답장이 오기를 기다렸고, 서쪽에서 히데요시가 돌아온다는 소식에 귀를 기울였고, 이탈하려는 부하들을 붙잡았으며, 천황의 공식 인정을 기다렸고, 교토 방어를 강화했고, 아즈치 성(安土城)을 점거해 노부나가가 평생 쌓아둔 물건들을 손에 넣었다. 6월 15일 무렵 천수각과 소켄지(摠見寺)가 소실됐는데, 누가 불을 댔는지는 사료마다 갈린다.

그러나 시간은 그의 편이 아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는 약해졌고, 같은 시간 어딘가에서 히데요시는 강해지고 있었다. 그의 계산은 명확했다 — 히데요시는 빗추 다카마쓰에서 모리와 대치 중이고, 그 자리를 정리하고 동쪽으로 돌아오려면 적어도 몇 주가 필요하다. 그 사이에 자기는 천황의 인정과 다이묘들의 합류를 끌어모을 수 있다. 그 계산이 무너지는 데에는 일주일이 채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며칠 후 계산 뿐만이 아니라 야마자키에서 그는 실제로 무너진다.

야마자키의 비
6월 13일, 야마자키(山崎)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교토와 오사카를 잇는 길목, 덴노잔(天王山)을 끼고 히데요시군과 아케치군이 마주섰다.
예상보다 일찍 — 11일 만에 — 히데요시가 돌아와 있었다. 어떻게 그렇게 빨리 빗추에서 교토 인근까지 군대를 끌고 올 수 있었는가는 다음 편(5편 — 주고쿠 대반환)의 이야기다. 지금 결정적이었던 것은 숫자였다. 미쓰히데 군 약 1만 6천, 히데요시 군 약 3만 5천에서 4만. 두 배가 넘는 병력 차였고, 사기와 식량의 차이는 그보다 더 컸다.
오후의 빗속에서 전투가 시작됐다. 결말은 빨랐다. 몇 시간이 지나기 전에 미쓰히데의 대열은 무너졌고, 덴노잔의 마루를 히데요시 측이 잡는 순간 승부는 결정됐다. 그날 이후 일본어에서 “덴노잔“은 “승부의 갈림길”을 가리키는 말로 굳어진다.

죽창 — 교양인의 마지막
패배한 미쓰히데는 측근 몇 명과 함께 어둠을 틈타 자기 거처인 사카모토 성(坂本城)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 길은 너무 멀었고, 그의 군은 이미 흩어진 뒤였다.
6월 13일 밤, 교토 후시미 동남쪽의 작은 마을 오구루스(小栗栖) 가까운 대나무 숲에서 일이 일어났다. 한 농민이 패잔병을 노려 죽창을 찔러넣었고, 그 끝에 미쓰히데의 옆구리가 닿았다. 후대 군기물은 그 농민의 이름을 나카무라 초베에(中村長兵衛)로 적기도 하나, 동시대 1차 사료에는 그저 “농민”으로만 남는다. 농민은 자기가 누구를 찔렀는지 알지 못했다고 전한다. 그저 도주 중인 무사 차림의 사람을 노렸을 뿐이었다.
다도에 능했고, 와카를 지었으며, 성을 축조했고, 조총 운용에까지 정통했던 당대 최고의 교양인 한 사람이, 어두운 대나무 숲의 진흙 위에서 이름 모를 농민의 죽창 한 자루로 끝났다.


그가 잡은 것은 없었다
13일 동안 미쓰히데는 무엇을 얻었는가. 그는 노부나가를 죽였고, 노부타다도 같은 새벽에 사라지게 했으며, 아즈치의 천수각에 앉았고, 천황에게 사자를 보냈다. 천하의 주인이 되는 일이 손 안에 있는 것처럼 보였던 시간이 있었다.
그리고 그 시간이 지나자 모든 것이 사라졌다. 사카모토 성은 함락됐고 그 안에 남아 있던 그의 가족은 스스로 끝을 맺었다. 가신들은 흩어졌다. 딸 가라샤는 시댁에서 단고의 산골에 유폐됐고, 18년 뒤 세키가하라 직전 오사카의 저택에서 자기 가신의 손에 자기를 베도록 명하고 죽었다. 소중한 사람들의 삶이 그의 결정 때문에 더 이르게, 또는 더 잔혹하게 끝났다.
그가 거사를 계획하며 무엇을 얻으려 했는지는 끝내 분명하지 않다. 천하를 바꾸려 했는지, 노부나가를 멈추려 했는지, 아니면 무너진 자존심을 회복하려 했는지 사료는 말해주지 않는다. 그러나 오구루스의 대나무 숲에서 그의 계획은(그게 무엇이든) 죽창 한 자루와 함께 끝났다. 손에 넣었다고 믿었던 권력과 명분은 13일만에 모두 사라졌고, 마지막 순간 그의 손에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사료 노트
- 노부타다의 위치 이동: 노부타다는 본래 혼노지 인근의 묘카쿠지(妙覚寺)에 묵고 있었고, 변 직후 아버지에게 합류하려다 길이 막혀 니조고쇼로 옮겨 농성했다는 사실은 신장공기에서 비교적 또렷이 확인된다. 미쓰히데 측이 보낸 별동대의 지휘는 사이토 도시미쓰가 맡았다는 후대 군기물의 기록이 있으나 동시대 1차 사료에 명시되어 있지는 않다.
- 노부타다의 자결: 신장공기는 노부타다가 니조고쇼 본관에서 항전 끝에 자결했다고 적는다. 시신은 노부나가와 마찬가지로 화재로 사라져 발견되지 않았다. 자결 방식은 명시되지 않았으나 본문에서는 다수설인 할복으로 적었다.
- 천황 알현: 미쓰히데가 천황 측에 사자를 보낸 사실은 동시대 공가 일기에서 확인된다. 다만 알현이 실제 성사됐는지, 어떤 진상물이 오갔는지에 대해서는 사료가 단편적이다. 황실의 신중한 태도 자체는 대체로 일치한다.
- 호소카와 후지타카의 삭발: 6월 9일경 단고에서 삭발해 호를 유사이(幽斎)로 바꿨다는 기록이 비교적 또렷하다. 가라샤를 미도노에 유폐한 것은 그 직후 타다오키의 결정이다.
- 야마자키 전투 병력 수: 미쓰히데 군 1만 3천~1만 6천, 히데요시 군 2만 5천~4만으로 사료에 따라 폭이 크다. 본문은 비교적 다수설인 1만 6천 vs 약 3만 5천~4만을 채택했다.
- 오구루스의 죽창: 농민의 이름과 정확한 장면은 후대 군기물·태합기류의 정착이 강하다. 동시대 1차 사료는 미쓰히데가 패주 중 농민의 손에 부상을 입고 자결했다는 사실만 짧게 전한다.
- 삼일천하라는 표현: 일본어 관용 표현으로 굳어진 시점은 후대(에도기)다. 동시대에 곧바로 그 표현이 쓰인 것은 아니다.
- 하시바 vs 토요토미: 1582년 시점의 히데요시는 아직 하시바 히데요시(羽柴秀吉)다. 토요토미(豊臣)라는 성씨는 1586년 천황으로부터 받은 것이며, 본문에서는 사건 시점에 맞춰 “히데요시”로 통일하고 가문 표기가 필요한 자리에 한해 “하시바”로 적었다.
출처
이미지 출처
생성형 이미지: 본문에 사용한 생성형 이미지는 Midjourney로 제작했다.
본문 출처
太田牛一 『信長公記(신장공기)』 — 노부타다의 항전과 자결, 미쓰히데의 군 행로, 야마자키 전투 직전까지의 시간선 등 1차 사료.
藤田達生 『謎とき本能寺の変』 講談社, 2003 — 미쓰히데의 정변 이후 다이묘 외교, 천황 알현 시도, 호소카와 후지타카의 거절에 대한 사료 비판적 정리 참조.
谷口克広 『信長と本能寺の変』 吉川弘文館, 2007 — 야마자키 전투 양군 병력 추정, 사카모토 성 함락의 디테일 참조.
太閤記·川角太閤記 류 군기물 — 오구루스의 죽창 일화, “삼일천하” 표현의 정착, 미쓰히데 마지막 순간의 변형 기록의 출처. 본문 내 사료 노트에서 별도 언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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