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1914년의 세계
이스라엘의 건국과 그를 둘러싼 분쟁의 원인은 3가지 키워드로 압축할 수 있다. — 오스만 제국의 패망, 시오니즘, 아랍 독립운동.
오스만 제국 — 팔레스타인의 주인
현대 이스라엘의 건국을 이해하려면 1914년에서 시작하는 것이 좋다. 그해 유럽 열강들은 참호 속에서 서로를 갈아 넣는 제1차 세계대전을 시작했다. 그 전쟁에 오스만 제국도 참전했다. 600년 이상 중동을 지배해온 이 제국은 독일 편에 섰고, 전쟁 전부터 내상이 깊던 몸은 총성이 시작되자 훨씬 빠른 속도로 무너지기 시작했다. 오스만이 무너지면 중동 전체가 빈 공간이 된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빈 공간을 차지하기 위해 영국과 프랑스는 이미 계산을 시작하고 있었다.
당시 오스만 제국의 영토였던 팔레스타인은 중요한 지역이었다. 이 작은 땅은 세 종교의 성지이기도 했고, 수에즈 운하로 가는 길목이기도 했으며, 오스만이 무너진 뒤 세력을 확장하려는 영국에 전략적으로 중요한 거점이기도 했다. 1900년대 초 기준으로 팔레스타인에는 아랍계 무슬림과 기독교인이 인구의 90% 가까이를 차지하며 살고 있었고, 유대인은 10% 안팎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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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오니즘
그 무렵 유럽에서 자라고 있는 하나의 운동이 있었다. 시오니즘(Zionism)이었다. 수백 년간 유럽 각지에서 차별과 박해를 받아온 유대인들 사이에서, 19세기 말부터 “우리도 나라가 있어야 한다”는 움직임이 생겨났다. 오스트리아 언론인 테오도르 헤르츨(Theodor Herzl)이 1896년에 쓴 책 한 권이 이 운동의 불씨를 당겼고, 그 이후 유대인들은 더 많이(그전부터 이주는 시작되고 있었다. 자세한 것은 알리야에서 다룬다)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성경에서 조상들의 땅이라고 부르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랍인들
유럽에서 시오니즘이 자라고 있었다면 아랍 지역에서는 아랍 민족주의(Arab Nationalism)가 자라고 있었다.
400년 동안 아랍 세계는 오스만 제국의 통치 아래 있었다. 이스탄불의 튀르크계 왕조가 다마스쿠스·바그다드·카이로·메카를 모두 다스리는 거대 제국이었다. 오스만 제국의 황제는 술탄이자 칼리프로서, 전 세계 수니파 무슬림의 수장이었다. 아랍인들은 주류 튀르크계 민족이 아니더라도 표면상으로는 같은 제국의 신민으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20세기 초부터 튀르크 민족 중심의 근대 국가로 재편되려는 움직임과 함께, 아랍인들은 자기들이 점점 “튀르크가 다스리는 종속 민족”이 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기 시작했다.
그 자각이 정치 운동으로 자라났다. 19세기 중반 다마스쿠스·베이루트·카이로의 아랍 지식인들이 시작한 문화·언어 부흥 운동인 나흐다(Nahda, 아랍 르네상스)가 20세기 초 정치 운동으로 옮아붙었다. 다마스쿠스의 알 파타트, 카이로의 알 아흐드 같은 비밀결사가 만들어졌고, 메카의 샤리프(무함마드의 혈통으로서 메카·메디나를 다스리는 종교적 통치자) 후세인 빈 알리 가문이 그 정치적 구심점으로 떠올랐다. 그들의 비전은 분명했다. 오스만이 무너지면 다마스쿠스·베이루트·예루살렘·바그다드·메카를 잇는 아랍 독립국가를 세운다.

팔레스타인도 그 비전에 포함됐다. 아랍 민족주의자들은 그 땅을 대시리아(Greater Syria) — 시리아·레바논·요르단·팔레스타인을 잇는 한 지역 — 의 자연스러운 일부로 봤다. 천 년 넘게 아랍어를 쓰는 무슬림과 기독교인이 다수로 살아온 자기 땅이었다. 그래서 1914년 오스만이 흔들리기 시작할 때, 아랍인들이 그 빈자리에 가장 먼저 떠올린 새 깃발은 시오니스트의 푸른 깃발도, 영국의 유니언잭도 아닌, 다마스쿠스에서 헤자즈까지 이어지는 자기들의 아랍 깃발이었다.
1914년, 이 모든 것이 한 지점을 향해 수렴하고 있었다. 무너지는 오스만 제국, 팔레스타인을 원하는 영국, 독립을 원하는 아랍인들, 팔레스타인에 나라를 원하는 유대인들. 그 가운데서 두 통의 편지가 쓰여졌다.
제2장: 두 통의 편지
첫 번째 편지 — 카이로, 1915년 맥마흔 서한
1915년 여름, 영국 고등판무관 헨리 맥마흔(Sir Henry McMahon)은 카이로 사무실에서 답하기 곤란한 편지를 읽고 있었다. 보낸 사람은 메카의 지도자 후세인 빈 알리(Sharif Hussein bin Ali). 내용은 간단했다. 오스만 제국에 맞서 아랍인들이 반란을 일으켜줄 테니, 전쟁이 끝나면 아랍 독립국가를 만들어달라는 것이었다. 팔레스타인을 포함한 광대한 영토를 요구하는 편지였다.
문제는 영국이 아랍인들에게 땅을 약속할 처지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같은 편이던 프랑스도 오스만 제국이 무너지면 중동을 나눠 가지려 했고, 영국은 이미 그 문제를 놓고 프랑스와 뒤에서 협상 중이었다. (이 비밀 협상은 이듬해 1916년, 사이크스-피코 협정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그 사정을 안고서 아랍인들에게도 뭔가를 주는 건 애초에 깔끔하게 정리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맥마흔은 답장을 썼다. 1915년 7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열 차례에 걸쳐 보낸 서한에서, 그는 시리아 해안 일부를 제외한 광대한 아랍 영토의 독립을 지지하겠다는 뉘앙스를 흘렸다. 팔레스타인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포함시키지도, 빼지도 않았다. 맥마흔은 아랍인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읽도록 편지를 쓰면서, 나중에 빠져나갈 여지를 남겨두었다.
두 번째 편지 — 런던, 1917년 밸푸어 선언
1917년 11월 2일, 영국 외무장관 아서 밸푸어(Arthur James Balfour)는 유대계 귀족 로스차일드(Lord Rothschild) 남작에게 편지 한 통을 보냈다. 단 67단어짜리 서한이었다.


이것이 밸푸어 선언(Balfour Declaration)이다. 영국이 유대인들에게 팔레스타인에 나라를 세울 수 있도록 돕겠다고 한 것이다. 그런데 팔레스타인에는 이미 아랍인들이 전체 인구의 90% 가까이를 차지하며 살고 있었다. 그리고 맥마흔은 이미 그 아랍인들에게 이 땅을 약속해놓은 상태였다.
영국이 왜 이런 이중 플레이를 했냐고 물으면, 답은 허무하다.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서였다. 아랍인들의 반란이 필요했고, 미국과 러시아 내 유대인들의 여론도 필요했으며, 수에즈 운하 근방에 친영(親英) 세력이 필요했다. 약속은 그냥 도구였다.
밸푸어 본인도 이걸 알고 있었다. 1919년 후임자에게 남긴 기밀 메모에서 그는 이렇게 썼다. “우리는 팔레스타인인들의 자기결정권 원칙을 적용할 의향이 없습니다.”
1922년, 국제연맹은 영국의 팔레스타인 위임통치를 공식 인정하면서 밸푸어 선언을 문서에 명시했다. 이제 유대 민족의 고향 건설을 지원할 법적 의무가 영국에 주어졌다. 다만 의무의 정확한 무게는 처음부터 논쟁의 대상이었다. 선언문은 “유대 국가”가 아니라 “민족적 고향“(national home)이라는 모호한 표현을 골랐고, “팔레스타인 비유대 공동체의 시민적·종교적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다”는 단서를 달았다. 시오니스트들은 이를 국가 수립을 향한 약속으로 읽었고, 아랍인들과 일부 영국 관료들은 종교적·문화적 정착지에 머물러야 한다는 한계로 읽었다. 같은 67단어가 양립 불가능한 두 약속을 동시에 담고 있었던 것이다.
제3장: 약속의 땅으로 모이는 사람들
“그 날에 여호와께서 아브람과 더불어 언약을 세워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이집트 강에서부터 그 큰 강 유프라테스까지 네 자손에게 주노니”
— 창세기 15:18

다섯 번의 파도 (1882~1939)
이주는 위임통치보다 훨씬 먼저 시작됐다. 1882년, 러시아에서 유대인 학살이 시작되던 해, 첫 무리가 팔레스타인으로 향했다. 시오니즘 운동에서는 이 이주 흐름을 단계별로 묶어 알리야(Aliyah, “올라감”)라 부른다. 1차부터 5차까지, 반세기에 걸친 다섯 번의 파도였다.

1차 알리야(1882~1903)는 러시아 황제 암살 뒤 쏟아진 포그롬이 촉발했다. 약 2.5~3.5만 명이 팔레스타인으로 건너가 첫 농업 정착촌 — 이른바 모샤바(moshava)를 세웠다. 2차 알리야(1904~1914)는 1903년 키시뇨프 학살이 다시 불을 댕겼고, 3.5만 명이 뒤를 이었다. 이 세대가 히브리어를 되살리고, 첫 키부츠를 만들고, 훗날 이스라엘의 초대 총리가 될 벤구리온을 팔레스타인 땅에 올려놓았다.
문 연 영국, 닫은 미국 (1919~1929)
1922년 첫 인구조사가 실시됐다. 팔레스타인 전체 인구 75만7천 명, 그중 유대인 11% 남짓. 그러나 영국의 위임통치가 시작되자 — 위임통치는 곧 밸푸어 선언이 국제 질서 안으로 편입됐다는 뜻이었다 — 배들이 본격적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3차 알리야(1919~1923)는 러시아 혁명 이후 동유럽 포그롬의 또 다른 물결과 위임통치 출범에 대한 기대가 뒤섞이며 약 4만 명을 팔레스타인으로 데려왔다. 히스타드루트(노동조합)와 하가나(자위대)가 이 시기 창설됐다. 이슈브, 즉 팔레스타인 유대인 공동체가 이때부터 국가의 형태를 갖춰가기 시작했다.
1924년, 미국 의회가 이민쿼터법을 통과시키면서 예상치 못한 결정타가 날아왔다 — 동유럽 유대인의 미국행이 사실상 막혀버린 것이다. 그동안 대서양을 향하던 이주의 흐름이 통째로 방향을 틀었고, 4차 알리야(1924~1929)로 약 8만 명이 팔레스타인으로 몰려들었다. 이 파도는 성격이 달랐다. 농업 정착민이 아니라 도시 중산층이었다. 텔아비브가 작은 정착촌에서 도시로 성장한 것이 이 시기였다. 1929년 무렵 유대인 비율은 16%를 넘어섰다.

나치 독일에서 탈출의 물결 (1930년대)
1933년 히틀러가 집권하면서 흐름은 이민이 아니라 탈출이 됐다. 5차 알리야(1929~1939)가 본격화된 것이다. 이번에는 동유럽 농민이 아니라 독일·오스트리아·중부유럽의 의사·변호사·엔지니어·건축가·음악가들이었다 — 전문직과 자본을 지닌 도시 계층이 통째로 밀려들었다. 해마다 수만 명씩 팔레스타인으로 들어왔고, 1935년 한 해에만 6만1천 명이 발을 디뎠다. 1936년 무렵에는 유대인 인구가 40만 명, 전체의 3분의 1에 다가서고 있었다. 14년 전 11%였던 비율이 33%가 되는 데 한 세대도 채 걸리지 않았다.
그러나 땅에는 주인이 있었다
이민자들은 시오니스트 기구들의 지원을 받으며 땅을 사들이고 정착촌을 세웠다. 아랍 지주들에게서 매입한 땅에서는 아랍 소작농들이 쫓겨났다. 한 세대 동안 그 땅에서 농사짓고 살아온 사람들이, 어느 날 새 주인이 들어와 떠나라 하면 떠나야 하는 처지였다. 쫓겨난 농민들의 분노는 갈 곳이 없었다. 영국은 두 공동체 사이에서 어느 쪽도 편들지 않으면서 상황이 악화되는 걸 지켜만 보고 있었다. 이제 시간을 다시 1920년으로 돌려보자.
제4장: 긴장의 누적 (1920~1928)
산레모 회의와 영국의 책상 위 지도
1차대전이 끝나고 1년 반이 지난 1920년 4월, 이탈리아 산레모에서 연합국이 모여 오스만 영토 분할을 확정했다. 산레모 회의(San Remo Conference)에서 결정된 것은 이랬다 — 시리아·레바논은 프랑스가, 이라크·트란스요르단·팔레스타인은 영국이 위임통치한다. 두 통의 편지(맥마흔과 밸푸어)와 비밀 협정(사이크스-피코)이 어지른 것들이, 이 회의 테이블 위에서 깔끔하게 정리되었다. 후세인이 약속받았다고 믿은 아랍 독립 국가는 고려의 대상조차 되지 못했다.
그해 7월, 영국은 군정을 민정으로 전환했다. 첫 고등판무관 허버트 사무엘(Herbert Samuel)이 예루살렘에 부임하면서, 사실상의 영국 통치가 시작됐다. 사무엘은 영국 유대계 정치인이자 친시오니스트 입장의 인물이었다. 아랍 측은 이 인사를 “밸푸어 선언이 곧 행정으로 옮겨오는 신호“로 받아들였다.
폭력의 시작 — 네비 무사와 야파
긴장은 사무엘이 부임하기도 전에 이미 폭발했다. 1920년 4월, 산레모 회의가 열리던 바로 그 시기에 예루살렘에서 무슬림의 봄 축제 네비 무사(Nebi Musa, 모세 예언자 축일)에 모인 군중이 유대인 거주 지역을 공격했다. 5명의 유대인과 4명의 아랍인이 죽었고, 200명 넘게 다쳤다. 위임통치기 첫 큰 폭력 사건이었다.
이듬해는 더 컸다. 1921년 5월 야파(Jaffa)에서 일어난 폭동에서 유대인 47명, 아랍인 48명이 사망했다. 메이데이 행진 중 유대인 사회주의자 두 분파의 충돌이 도화선이 됐고, 야파의 아랍 군중이 곧장 유대인 거주 구역을 공격했다. 영국 정부는 충격을 받았다. 그해 발표된 처칠 백서(1922)로 유대인 이민에 첫 제한선이 그어졌지만, 그 제한은 형식적이었고 사람들은 계속 들어왔다.
약속이 국제법이 되다 (1922)
영국 위임통치는 1922년 7월 24일 국제연맹 위원회 결의로 정식 승인됐다. 승인 문서에는 밸푸어 선언 문구가 그대로 들어갔다. 이제 “팔레스타인에 유대 민족의 민족적 고향을 세우도록 영국이 협력한다“는 약속이 단순한 외교 편지가 아니라 국제법적 의무가 됐다.
1916년 사이크스-피코로 영불이 갈라먹은 영토, 1917년 밸푸어 선언이 — 이 한 장의 위임통치 결의로 영국의 공식 책임으로 통합된 것이다. 맥마흔이 후세인에게 흘렸던 약속만이 그 종이 위에 오르지 못했다. 그 통합은 모순의 해소가 아니라 모순의 합법화였다.
잠시의 소강, 그러나 끓고 있던 솥 (1922~1928)
1921년 야파 폭동 이후 1928년까지 약 7년간, 팔레스타인은 표면적으로는 비교적 조용했다. 큰 유혈 사태는 없었다. 그러나 그 7년은 평화가 아니라, 두 사회가 서로에게서 점점 더 분리되고 각자 안에서 점점 더 단단해지는 시기였다. 유대인 공동체(이슈브)는 자치 기구·노동조합 히스타드루트·지하 민병대 하가나(1920 창설)를 차근차근 만들어갔고, 아랍 사회는 그랜드 무프티 알 후세이니 중심으로 종교 권위와 정치 조직을 결합시켜갔다.
그리고 두 사회 사이의 마찰점은 점점 한 자리로 모이고 있었다. 예루살렘 성전산, 더 정확히는 그 서쪽 외벽 — 유대인의 통곡의 벽이자 무슬림의 알부라크였던 그 자리였다.
에필로그: 한 자리로 좁혀진 화약고
1914년의 무너지는 오스만 제국에서 시작한 이야기가 1928년 문턱에 닿았다. 그 사이 한 땅 위에 두 통의 편지가 겹쳐 떨어졌고, 잉크가 마르기 전에 사람들이 발걸음으로 도착했다. 유대인은 다섯 번의 물결을 이루며 밀려들었고, 아랍인은 그 땅에 이미 뿌리내린 채 살고 있었다. 영국은 양쪽 모두에게 약속하고 양쪽 모두를 통제하지 못했다.
표면의 7년은 조용했지만, 그 아래에서 두 사회는 서로에게서 멀어지며 각자 안으로 단단해졌다. 그리고 그 모든 긴장이 흘러가 모이는 자리가 하나 있었다. 예루살렘의 한 뼘 외벽, 유대인에게는 통곡의 벽이고 무슬림에게는 알부라크였던 그곳이다.
화약고는 이미 만들어져 있었다. 남은 것은 불씨 하나였다. 그리고 그 불씨는 1928년 가을, 바로 그 벽 앞에서 놓이게 된다. 다음 편의 이야기다.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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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출처
영미조사위원회 부록(1946)
UN UNSCOP 조사 통계
미 국무부 외교문서(FRUS)
Journal of Palestine Studies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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