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에서 우리는 두 통의 편지를 보았다. 아랍인에게 독립을 약속한 1915년의 맥마흔 서한, 그리고 유대인에게 민족적 고향을 약속한 1917년의 밸푸어 선언. 한 땅 위에 두 약속이 겹쳐졌고, 그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사람들이 발걸음으로 도착했다. 1920년대가 저물 무렵 팔레스타인에는 두 민족이 나란히 살고 있었지만, 그 나란함은 이미 아슬아슬한 균형이었다.
이 글은 그 균형이 무너지는 20년의 기록이다. 시작은 벽 하나였다.
제1장: 벽 하나에서 시작된 충돌
통곡의 벽으로부터
1928년 9월, 욤 키푸르(Yom Kippur, 속죄일)에 유대인들이 예루살렘 통곡의 벽(Western Wall)에 남녀 예배자를 구분하는 임시 가림막(메히차)을 설치했다. 정통 유대교 회당에서는 남녀가 따로 기도하는 것이 오랜 전통이었기 때문이다. 작은 일처럼 보였지만, 무슬림들에게는 다르게 읽혔다. 그 벽이 유대인에게는 성전의 마지막 흔적이었지만, 무슬림에게는 하람 알샤리프 서쪽 외벽, 곧 알부라크(무함마드가 야간 여행 때 천마 부라크를 매어놓았다고 전해지는 자리)의 일부였기 때문이다. 더구나 오스만 시대부터 그 자리에는 의자나 병풍, 가림막처럼 예배 장소를 고정 시설처럼 보이게 하는 물건을 두지 않는다는 현상 유지 관행이 있었다. 기도 편의가 회당화로 번지고, 회당이 다시 영구 권리 주장의 발판이 될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래서 임시 가림막 하나도 무슬림들 눈에는 유대인들이 그 벽을 사실상의 회당으로 바꾸고, 언젠가는 성전산 전체의 권리까지 주장하려 한다는 신호처럼 보였다.

예루살렘의 그랜드 무프티 아민 알 후세이니(Amin al-Husseini)는 무슬림 공동체를 결집시켰고, 긴장은 여름 내내 쌓여갔다. 1929년 8월 15일, 수정주의 시오니즘 단체 청년들 수천 명이 텔아비브에서 예루살렘으로 행진해 통곡의 벽 앞에서 시오니스트 깃발을 흔들며 “통곡의 벽은 우리의 것”이라 선언했다. 이튿날, 2천 명의 무슬림 군중이 통곡의 벽으로 몰려와 유대인들의 기도서와 성구함을 불태웠다. 그리고 8월 23일 금요일 예배가 끝나자마자, 팔레스타인 전역에서 폭력이 터졌다.

헤브론 학살
가장 참혹한 일은 다음 날 헤브론(Hebron)에서 벌어졌다. 8월 24일, 성난 군중이 유대인 거주 지역과 신학교, 아랍인을 치료하던 유대인 의사의 집까지 들이닥쳤다. 헤브론의 유대인 67명이 단 하루 만에 죽었다. 다만 그날의 기록에는 다른 결도 함께 남아 있다. 일부 아랍인 가정이 이웃 유대인들을 자기 집에 숨겨 목숨을 구했다는 증언들이다. 학살과 구원이 같은 골목에서 동시에 일어났다. 일주일간의 폭동이 끝났을 때 유대인 133명이 죽고 339명이 다쳤으며, 영국 경찰의 진압 과정에서 아랍인 116명이 사망했다.

영국 조사단은 폭동의 원인을 “아랍인들이 느끼는 뿌리 깊은 적대감”이라고 진단했다. 그러나 처방 없는 진단이었다. 이민을 멈출 것인가, 밸푸어 선언을 거둘 것인가에 대해서는 아무 결론도 내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노동 시오니즘 진영의 핵심 지도자이자 훗날 이스라엘 초대 총리가 되는 다비드 벤구리온(David Ben-Gurion)에게 헤브론은 하나의 결론이었다. 그는 노동계급의 연대로 아랍인들과 공존할 수 있다는 이상을 헤브론의 피에 묻었다. 유대인이 살아남으려면 스스로 무장해야 한다는 것, 그것이 그가 내린 결론이었다. 그는 유대인 지하 민병대 하가나(Haganah)를 정규군 수준으로 재편하기 시작했고, 1946년 무렵 하가나의 규모는 6만 명을 넘어섰다.
제2장: 3년의 반란, 그리고 첫 번째 분할안
팔레스타인 총파업과 아랍 대반란
헤브론의 피가 마른 뒤에도 판은 가라앉지 않았다. 영국은 조사위원회를 꾸렸지만 밸푸어 선언을 거두지 않았고, 유대인 이민도 멈추지 않았다. 헤브론 학살로부터 4년이 지난 1933년, 히틀러 집권 뒤 독일과 동유럽에서 탈출한 유대인들이 더 많이 들어오자 아랍 사회의 공포는 한층 커졌다. 땅값은 뛰었고, 소작농 축출과 실업에 대한 불만도 쌓였다. 1935년에는 반영·반시오니즘 설교로 영향력을 넓히던 이즈 앗딘 알카삼이 영국군에게 사살됐다. 그의 죽음은 흩어져 있던 분노를 조직된 정치 행동으로 바꾸는 도화선이 됐다.
아랍인들의 요구는 세 가지였다. 유대인 이민 즉각 중단, 유대인에 대한 토지 양도 금지, 독립 정부 수립. 1936년 4월, 팔레스타인 전역에서 아랍 최고위원회가 주도하는 총파업이 선언됐다. 상점이 문을 닫고, 항만 노동자가 손을 놓고, 세금 납부가 거부됐다. 6개월간 이어진 이 총파업은 곧 무장 봉기로 번졌다. 이것이 1936년부터 1939년까지 이어진 아랍 대반란(Arab Revolt in Palestine)이다.

필 위원회의 칼 — 땅을 둘로 가르자는 첫 제안
총파업이 반년째 이어지던 1936년 말, 영국은 또 하나의 조사위원회를 파견했다. 이번에는 전직 인도 총독을 지낸 필 경(Lord Peel)이 이끄는 왕립 위원회였다. 그들은 몇 달간 팔레스타인을 돌며 양측의 증언을 들었고, 1937년 7월 보고서를 내놓았다.
보고서의 결론은 그때까지 어떤 영국 문서도 입에 담지 않았던 것이었다. 아랍인과 유대인은 한 나라 안에서 함께 살 수 없다, 그러니 땅을 둘로 나누자는 것이었다. 필 위원회는 팔레스타인 북부의 갈릴리와 지중해 연안 평야 일부를 유대 국가로(전체의 약 5분의 1), 나머지 대부분을 트란스요르단과 합쳐 아랍 국가로, 예루살렘과 그 회랑은 영국이 계속 관리하는 안을 제시했다. 그리고 여기에 한 문장이 더 붙어 있었다. 두 나라의 경계가 깔끔해지려면, 유대 국가 안의 아랍인 약 22만 명과 아랍 국가 안의 유대인 수천 명을 서로 맞바꿔 옮기자는 것이었다. 필요하다면 강제로.
이 “인구 이동” 제안은 몇 년 전 그리스와 터키가 주민 150만 명을 강제로 맞교환한 선례에서 따온 것이었다. 지도 위에서는 합리적인 정리처럼 보였지만, 땅에 뿌리내린 사람에게 그것은 고향에서 뽑혀 나간다는 뜻이었다.

반응은 양쪽 모두에서 갈렸다. 유대 진영 안에서도 격론이 붙었다. 자보틴스키의 수정주의자들은 요르단강 서안 전체를 포기할 수 없다며 반대했지만, 벤구리온은 달랐다. 그는 지금 손에 쥘 수 있는 작은 국가라도 먼저 세우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다. 아무리 작아도 주권을 가진 유대 국가 하나가 생기면, 그것은 다음을 위한 발판이 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아랍 측은 분할안 자체를 거부했다. 인구의 다수인 자신들이 왜 소수 이주민에게 땅을 떼어주고, 심지어 조상 대대로 살던 마을에서 쫓겨나야 하는지 받아들일 수 없었다. 필 위원회의 보고서는 잠시 가라앉았던 반란에 다시 불을 붙였다. 1937년 가을부터 봉기는 훨씬 격렬한 2차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영국은 군대를 보냈다. 마을을 포위하고, 집을 부수고, 지도자들을 추방했다. 3년이 지났을 때 아랍인 5천 명 이상이 죽고 1만5천 명이 다쳤으며 5,600명이 감옥에 갔다. 많게는 4만 명이 쫓겨나거나 피신했다. 팔레스타인 아랍 사회의 군사적, 정치적 지도부는 이 과정에서 사실상 초토화됐다. 이 공백은 10년 뒤 1948년에 치명적인 결과로 돌아오게 된다.

제3장: 백서, 학살, 빌트모어
1939년의 백서 — 하필 그때 닫힌 문
3년의 반란은 영국을 지치게 했다. 유럽에서는 또 다른 전쟁의 그림자가 짙어지고 있었고, 영국은 중동의 아랍 세계를 적으로 돌릴 여유가 없었다. 다가오는 전쟁에서 수에즈 운하와 중동의 석유, 그리고 아랍 국가들의 협조가 절실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국은 저울을 아랍 쪽으로 기울였다.
1939년 5월, 영국은 새로운 정책 문서를 발표했다. 식민장관의 이름을 따 맥도날드 백서, 흔히 1939년 백서(White Paper of 1939)라 불리는 문서였다. 내용은 유대인에게 충격이었다. 앞으로 5년 동안 유대인 이민을 총 7만 5천 명으로 묶고, 그 뒤로는 아랍인의 동의가 있어야만 이민을 받겠다는 것이었다. 유대인의 토지 구매도 대부분의 지역에서 금지되었다. 그리고 10년 안에 아랍인이 다수인 단일 독립국가를 세우겠다고 명시했다. 사실상 밸푸어 선언의 약속을 거둬들이는 문서였다.
문제는 시점이었다. 백서가 발표된 1939년, 바로 그해 나치 독일의 유대인 박해는 절정으로 치닫고 있었다. 유럽의 유대인들이 필사적으로 탈출구를 찾던 바로 그 순간에, 영국은 그들이 갈 수 있었던 거의 유일한 문을 걸어 잠근 것이다.
벤구리온은 이 모순을 한 문장으로 정리했다. 2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백서가 없는 것처럼 히틀러에 맞선 전쟁을 도울 것이고, 전쟁이 없는 것처럼 백서에 맞서 싸우겠다고. 유대인들은 영국군에 자원해 나치와 싸우면서, 동시에 영국의 이민 봉쇄에 저항했다. 두 개의 전쟁을 동시에 치른 셈이었다.
홀로코스트 — 숫자가 바꾼 세계의 마음
백서가 문을 걸어 잠근 그 몇 해 동안, 유럽 안에서는 인류사에서 가장 참혹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나치 독일이 유대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유럽 전역의 유대인을 조직적으로 붙잡아 수용소로 보내고, 가스실에서 대량으로 학살한 것이다. 이 학살을 후대는 홀로코스트(Holocaust)라 부른다. 전쟁이 끝나고 유럽의 문이 열렸을 때, 세계는 그 수용소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비로소 알게 됐다.
나치가 학살한 유럽 유대인은 약 600만 명에 달했고, 폴란드와 동유럽의 유대인 공동체는 통째로 사라졌으며, 살아남은 사람들에게도 돌아갈 곳은 없었다. 고향 마을은 폐허가 되었거나 이웃에게 점령당했고, 돌아가려 해도 반유대 폭력이 그들을 다시 내몰았다. 유럽 곳곳의 난민 수용소(DP 캠프)에 수십만 명의 생존자가 머물렀고, 그들 다수가 원한 목적지는 하나였다. 팔레스타인이었다.
그러나 영국의 1939년 백서는 여전히 유효했다. 이민 문은 좁았고, 합법적으로 들어갈 수 있는 인원은 한 줌이었다. 그래서 생존자들은 낡은 배에 몸을 싣고 지중해를 건넜다. 영국 해군은 이 배들을 막아 세웠고, 승객들을 키프로스의 수용소로 돌려보내거나, 어떤 경우에는 그들이 방금 탈출한 유럽으로 되돌려 보냈다.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을 다시 독일 땅의 수용소로 실어 보내는 장면은, 국제 여론이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이 시기를 지나며 세계의 마음이 움직였다. 유대 국가의 필요성은 이제 시오니스트의 주장이 아니라, 홀로코스트를 목격한 국제사회의 죄의식과 동정이 뒷받침하는 명분이 되었다. 특히 미국의 여론이 결정적으로 기울었다.
빌트모어 — 무게중심이 런던에서 워싱턴으로
그 변화를 시오니즘 운동은 놓치지 않았다. 1942년 5월, 전쟁이 한창이던 때에 미국 뉴욕의 빌트모어 호텔에 시오니스트 지도자들이 모였다. 이 자리에서 그들은 처음으로 목표를 분명한 말로 못 박았다. 팔레스타인을 “유대 공동체”, 곧 하나의 유대 국가로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표현의 변화 이상이었다. 그때까지 시오니즘의 공식 언어는 밸푸어 선언에서 빌려온 “민족적 고향(national home)”이라는 모호한 말이었다. 고향은 국가일 수도, 자치 공동체일 수도, 문화적 중심지일 수도 있었다. 빌트모어 강령은 그 모호함을 걷어내고 “국가(commonwealth)”라고 또렷이 선언했다.
동시에 운동의 무게중심도 옮겨갔다. 밸푸어 선언을 얻어낸 시오니즘의 심장은 오랫동안 런던이었지만, 영국이 백서로 등을 돌린 지금, 새로운 후원자는 미국이었다. 빌트모어 호텔에서의 그 회의는, 시오니즘이 런던의 응접실에서 워싱턴의 정치로 자리를 옮기는 상징적 장면이었다. 그리고 이 방향 전환은 5년 뒤 유엔 표결에서 미국이 분할안을 강하게 밀어붙이는 것으로 결실을 맺는다.
제4장: 유대인들이 영국을 겨누다
전쟁이 끝났지만 영국은 백서를 거두지 않았다.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이 문 앞에 서 있는데도 이민 문은 여전히 좁았다. 나치와 함께 싸웠던 유대인들에게 이것은 배신 위에 얹힌 배신이었다. 그러자 유대인 무장 단체들이 총구를 영국으로 돌렸다.
하가나가 주로 방어와 이민 지원에 집중했다면, 그 곁에는 훨씬 공격적인 조직들이 있었다. 이르군(Irgun)과 레히(Lehi)였다. 이들은 영국 시설과 관리를 겨냥한 폭탄 공격과 암살을 감행했고, 그 강도는 갈수록 세졌다. 1946년 7월, 이르군은 예루살렘의 킹 데이비드 호텔을 폭파했다. 이 건물에는 영국 행정청과 군 사령부가 들어 있었다. 폭발로 91명이 죽었다. 유대 무장 세력은 위임통치 권력의 심장을 쳤다고 여겼지만, 세계는 이 장면을 다르게 읽었다. 팔레스타인은 더 이상 영국이 통제할 수 있는 땅이 아니라는 신호였다.

아랍에서도 맞고, 유대인에게서도 맞고, 국제 여론에서도 밀리던 영국은 계산을 끝냈다. 2차대전으로 재정은 바닥났고, 팔레스타인을 붙들고 있는 비용은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었다. 1947년 초, 영국은 백기를 들었다. 팔레스타인 위임통치를 포기하겠다고 선언하고, 이 문제를 신생 기구 유엔(UN)에 넘긴 것이다. 불을 질러놓고 뒤로 빠지는 셈이었다.
제5장: 팔레스타인이 두 나라로 쪼개지다
공을 넘겨받은 유엔은 특별위원회(UNSCOP)를 꾸려 현지 조사에 나섰다. 그들이 올린 보고서의 숫자는 이랬다. 1947년 팔레스타인 인구는 아랍인 약 120만 명, 유대인 약 60만 명이었고, 유대인이 법적으로 소유한 땅은 전체의 7~10%에 불과했다. 위원회는 두 개의 안을 내놓았다. 다수안은 땅을 두 나라로 나누고 예루살렘을 국제 관리에 두는 분할안, 소수안은 하나의 연방국가를 세우는 안이었다. 국제사회가 선택한 것은 분할이었다. 10년 전 필 위원회가 처음 꺼낸 그 해법이, 이번에는 유엔의 이름으로 돌아온 것이다.
1947년 11월 29일, 유엔 총회는 팔레스타인을 두 나라로 나누는 결의안 181호를 찬성 33, 반대 13, 기권 10으로 통과시켰다.

분할안의 내용을 뜯어보면 아연해진다. 인구의 33%인 유대인에게 땅의 56.47%를, 인구의 67%인 아랍인에게 42.88%를 배정했다. 지중해 연안의 비옥한 평야와 주요 항구는 대부분 유대국 쪽에 들어갔다. 더 미묘한 것은 인구 구성이었다. 유대국으로 배정된 땅 안에 아랍인이 40만 명 넘게 살고 있었고, 이는 그 땅의 유대인 수와 거의 맞먹었다. 몇개의 선으로 거대한 소수민족 문제가 생기도록 설계된 지도였다.
유대인 지도부는 환영했다. 불만스러운 점도 있었지만, 국제법적으로 독립국가를 세울 토대로는 충분했다. 아랍 측은 즉각 거부했다. 자신들의 땅에서, 자신들보다 훨씬 적었던 이주민들에게 땅의 절반 이상을 내어주라는 명령이었기 때문이다. 두 개의 대답 사이에는 타협의 여지가 없었다.
그날 밤 텔아비브의 거리는 환희로 가득 찼다. 사람들은 광장으로 쏟아져 나와 춤을 췄다. 2천 년의 유랑 끝에 마침내 국가를 세울 국제적 허락을 받은 밤이었다. 그러나 유대 기구 의장이자 곧 이스라엘 초대 총리가 될 벤구리온은 그 환호 속에서 혼자 다른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이 결의가 축복이자 동시에 전쟁 개시 신호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훗날 그는 이날의 심경을, 기뻐하는 군중 속에서 홀로 애도했다고 기록했다. 무슨 일이 올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에필로그: 폭풍이 오고 있었다
30년의 궤적을 되짚으면 결국 두 통의 편지로 돌아온다. 아랍인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읽히도록 쓰였지만 뒤에 빠져나갈 구멍을 남겨둔 1915년의 맥마흔 서한. 그리고 2년 뒤, 팔레스타인 아랍인 다수의 운명을 그들의 동의 없이 결정해버린 67단어의 밸푸어 선언. 그 두 약속이 겹쳐진 자리에서, 통곡의 벽과 헤브론과 아랍 대반란과 백서와 홀로코스트가 차례로 쌓였다.
영국은 손으로 불을 지르고 발을 뺐다. 유엔은 집행 장치 없는 분할 지도를 내밀고 물러섰다. 그 공백 속에서 두 민족은 20년에 걸쳐 서로를 향한 증오와 총을 갈고닦아 왔다. 종이 위의 분할선은 곧 현실의 총성으로 바뀔 참이었다.
결의안이 통과되고 하루도 지나지 않아, 팔레스타인의 어느 길 위에서 첫 총성이 울렸다. 그 총성이 어디로 번져 어떻게 전면전이 되는지, 그리고 벤구리온의 애도가 왜 반년 뒤 건국 선언의 날 다시 메아리치는지는 다음 편의 이야기다.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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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미디어 공용(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및 CC BY-SA 라이선스. 라이선스 표기는 각 사진 캡션 참조.
생성형 이미지: 본문에 사용한 생성형 이미지는 Midjourney로 제작했다.
본문 출처
UN UNSCOP 조사 통계 및 유엔 총회 결의안 181호(1947) 문서
영미조사위원회 부록(1946) — 인구·토지 소유 통계
Peel Commission Report(Palestine Royal Commission Report, 1937) — 최초 분할안 및 인구 이동 제안
MacDonald White Paper(1939) — 유대인 이민·토지 제한 정책
Biltmore Program(1942) 결의문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 아랍 대반란 사상자 통계, 위임통치기 개요
Journal of Palestine Stud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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