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사
마리 앙투아네트 · 3편

이야기가 죽인 여자
— 마리 앙투아네트

(3) 트리아농의 여자

이야기가 죽인 여자 — 마리 앙투아네트 (3) 트리아농의 여자

왕이 죽다

1774년 5월 10일 오후 세 시 반, 베르사유 궁의 한 창문에서 초가 꺼졌다.

그 창은 왕의 침실 창이었고, 루이 15세가 천연두로 누운 지 열흘째 되는 날이었다. 초가 꺼지는 것은 왕의 죽음을 알리는 신호였다. 전염이 두려워 방 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복도와 정원에서 기다리던 궁정은, 그 불빛이 사라지는 것을 보고 동시에 숨을 멈췄다.

다음 순간, 수백 명의 귀족이 일제히 복도를 달려가는 발소리가 시작되었다. 그들은 새 왕에게로 가고 있었다. 베르사유의 오래된 관습대로 왕의 임종 순간 궁정 전체는 옛 왕을 버리고 새 왕에게로 달려가야 했고, 사람들은 이 현상을 ‘천둥’이라고 불렀다.

그 천둥이 멈춘 방에는 열아홉 살의 루이 오귀스트와 열여덟 살의 마리 앙투아네트가 있었다. 두 사람은 갑자기 달려든 궁정 앞에서 무릎을 꿇었고, 전승에 따르면 동시에 이렇게 기도했다고 한다. “하느님, 저희를 보호하소서. 저희는 너무 어려서 이 자리를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날 그들은 루이 16세와 왕비가 되었다. 같은 날, 뒤 바리 백작부인은 이미 베르사유를 떠나 수도원에 가 있었다. 왕의 병이 치명적임이 확인된 순간 교회의 의전에 따라 그녀가 왕 곁에서 떨어져야 했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베르사유의 실질적 권력이었던 한 여자가 사라진 자리에, 이제 다른 여자가 들어섰다. 왕의 정부가 아니라 왕의 아내였다.

그 여자는 오스트리아에서 온 열여덟 살이었다.

천둥의 끝 — 새 왕에게 달려온 궁정
1774년 5월 10일, 베르사유 궁의 한 방. 열여덟 살 마리 앙투아네트와 열아홉 살 루이 오귀스트가 무릎을 꿇고 있다. 창백한 얼굴에는 슬픔이 아니라 경외와 두려움이 있다. 뒤쪽 복도에서 수백 명의 귀족이 그들을 향해 달려오고 있다 — 분칠한 가발, 실크 궁정복, 넓은 파니에 드레스의 물결. 작은 기도대, 한 자루의 양초, 금박 나무 바닥 위에 떨어지는 오후의 햇빛.

선물받은 집

왕위에 오른 지 몇 달 되지 않아, 루이 16세는 왕비에게 한 채의 저택을 선물했다. 왕이 왕비에게 사적인 저택을 선물한 것은 베르사유의 역사에서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그 저택의 이름은 프티 트리아농이었다. 베르사유 궁 북쪽 숲 가장자리에 있는 작은 신고전주의 건물로, 원래 루이 15세가 마담 드 퐁파두르를 위해 착공했으나 완공되기 전에 퐁파두르가 세상을 떠났고, 이후 왕의 마지막 애첩 뒤 바리가 사용하던 자리였다. 왕이 죽고 뒤 바리가 수도원으로 떠나면서, 그 집은 자연스럽게 새로운 왕비에게 넘겨졌다.

마리는 이곳을 자신의 것으로 개조했다. 베르사유의 의전은 여기서 허락되지 않았고, 왕비의 동의 없이는 왕 자신도 들어올 수 없다는 원칙이 세워졌다. 그녀는 흰 모슬린 드레스를 입고 머리카락을 자유롭게 풀었으며, 친구들과 차를 마시고 정원을 오래 걸었다.

열네 살에 라인 강의 섬에서 오스트리아 옷이 벗겨지고, 스무 살도 되기 전에 왕비가 되고, 수십 명의 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아침마다 옷을 갈아입어야 했던 한 여자가 — 드디어 혼자일 수 있는 장소를 가지게 된 것이었다. 그녀에게 이 공간은 처음으로 자신의 몸이 공적인 재산이 아닐 수 있는 장소였다.

그러나 궁정은 이를 다르게 읽었다. 왕비가 귀족을 따돌리고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며 국가의 의전을 배신한다는 이야기였다. 복도와 살롱에서 속삭임이 시작되었다. 아주 작게, 그러나 계속.

프티 트리아농의 봄 오후
프티 트리아농의 외관, 봄의 오후. 흰 벽의 작은 신고전주의 저택, 잔디와 꽃. 한가하고 조용한 분위기. 거대한 베르사유와 대비되는 작고 아늑한 공간. 멀리 우뚝 솟은 베르사유 본궁의 지붕이 보인다.
프티 트리아농 (Petit Trianon)베르사유 왕궁 부지의 북쪽에 위치한 작은 신고전주의 저택. 1762년 루이 15세가 마담 드 퐁파두르를 위해 착공했으나 1764년 퐁파두르 사망으로 완공(1768) 전에 주인을 잃었고, 이후 뒤 바리가 사용하다가 루이 15세 사후 루이 16세가 왕비에게 선물했다. 마리는 훗날 이곳에 자신의 “햄릿(Hameau de la Reine)” — 목가적 농장 마을 세트를 만들고 양과 닭을 키웠다. 오늘날에도 거의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신고전주의 (Néoclassicisme)18세기 중후반 유럽에서 로코코의 장식 과잉에 대한 반동으로 등장한 미술·건축 양식. 고대 그리스·로마의 단순한 비례, 기하학적 형태, 절제된 장식을 이상으로 삼았다. 프티 트리아농(1762~1768)은 건축가 앙주자크 가브리엘이 루이 15세의 의뢰로 지은 프랑스 신고전주의 초기의 대표작으로, 베르사유 본궁의 화려한 바로크·로코코와 정반대의 미감을 보여준다. 마리 앙투아네트가 찾던 ‘단순하고 사적인 공간’이라는 감각은 이 건축 양식 위에서만 가능했다.

폴리냑

그 속삭임이 아직 마리의 귀에 닿기 전에, 그녀에게는 한 가지 더 중요한 일이 생겼다. 친구를 만난 것이다.

1775년, 마리의 시선이 어떤 궁정 행사의 한구석에서 한 여자에게 걸렸다. 마리보다 여섯 살 많은 귀족 여성, 가브리엘 드 폴리냑 백작부인이었다. 아름답고, 조용하고, 궁정의 격식에 별 관심이 없어 보였다. 마리는 그녀에게 매혹되었고, 몇 달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거의 매일을 함께 보냈다.

마리에게 폴리냑은 그녀가 지금껏 한 번도 갖지 못한 존재였다.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는 편지로만 존재했고 엄격하며 감정적으로 멀었으며, 남편은 7년간 그녀의 몸에 닿지 못한 채 여전히 사냥과 자물쇠 공방으로 시간을 보냈다. 그 외로움의 바닥에 폴리냑이 있었고, 마리는 처음으로 누군가의 곁에 있는 느낌을 가졌다.

우정이 깊어질수록, 마리는 폴리냑 가문에 거액의 연금과 관직을 수여했고, 친정의 부채를 왕실이 갚아주게 했으며, 친인척들에게까지 궁정의 요직을 배정해 주었다. 베르사유의 역사 속에서 전례 없는 수준의 지원이었다.

마리에게 그것은 친구를 위한 사랑의 표현이었으나, 궁정의 다른 귀족들에게는 편애이자 배신으로 읽혔다. 특히 오래된 프랑스 귀족 가문들은 격분했다. 왕비가 외국인이면서 자신의 파벌만 챙기고 전통 있는 가문들을 무시한다는 것이 그들의 분노였다. 그들은 어떻게 왕비를 고립시킬지 조용히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마리는 이것을 몰랐다. 그녀에게 폴리냑은 사랑이었고 트리아농은 평화였으며, 그 평화 속에서 그녀는 곧 자신의 삶에서 가장 큰 것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폴리냑과의 오후
프티 트리아농의 정원, 오후. 마리 앙투아네트와 폴리냑 백작부인(20대 후반, 아름답고 우아한 다크브루넷)이 작은 대리석 의자에 앉아 차를 마시며 이야기한다. 친밀한 두 여자의 대화. 아이들이 뒤에서 놀고 있다. 부드러운 햇살, 장미, 책 한 권. 평온함 속에 희미한 불안.

첫 아이

1778년 12월 19일, 베르사유 왕비의 침실에서 한 아이가 태어났다. 마리 테레즈 샤를로트. 스물셋의 마리는 프랑스에 온 지 8년, 왕비가 된 지 4년이 지나 있었다.

법은 왕위 계승의 진위를 확인하기 위해 왕비의 침실에 50명이 넘는 귀족을 들여보냈다. 그토록 많은 증인 속에서 마리는 산소 부족으로 의식을 잃었다가 깨어났다. 잠시간의 어둠, 그리고 다시 빛이 있었다.

태어난 것은 딸이었다. 기다리던 왕세자가 아니었다. 그러나 루이 16세는 왕비를 바라보며 속삭였다. “너는 나의 것이야.” 역사가들이 이 순간을 기록했지만, 우리는 그 말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했는지는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다만 그 순간 마리 앙투아네트는 처음으로 어떤 감정을 분명히 알았다. 이 아이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겠다는 것. 그것은 그녀가 남편을 통해서도, 어머니를 통해서도 한 번도 배우지 못했던 감정이었다.

4년 전 “저희는 너무 어려 감당할 수 없습니다”라고 기도했던 소녀는, 이제 자신이 보호해야 할 존재를 품에 안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아이와 함께, 그녀는 자신의 트리아농으로 돌아갔다. 궁정 바깥의 삶은 이제 혼자만의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이 시기를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기라고 훗날 편지에 적었다. 3년 뒤인 1781년 10월에는 마침내 기다리던 왕세자 루이 조제프가 태어나면서, 그 행복은 한층 더 깊어졌다.

첫 아이를 안은 마리 앙투아네트
1778년 12월, 베르사유의 왕비 침실. 출산 직후 기진한 마리 앙투아네트(23세, 야윈 얼굴, 땀에 젖은 머리)가 흰 천에 싸인 신생아를 품에 안고 있다. 옆에는 루이 16세가 아이를 바라보고 있다. 부드러운 촛불. 먼지 많은 금박 커튼. 지켜보던 귀족들은 이제 물러갔고, 방은 처음으로 조용하다.

흰 모슬린

그 행복은 곧 그녀를 공격하는 무기가 된다.

1783년, 화가 비제 르브룅이 한 폭의 초상화를 완성했다. 스물여덟 살의 마리 앙투아네트가 야외 정원을 배경으로 손에 장미 한 송이를 들고 서 있는 그림이었다. 그녀가 입은 것은 베르사유의 견직 드레스가 아니라 트리아농에서 입던 흰 모슬린 슈미즈 드레스, 그녀가 가장 자신답다고 느끼는 옷차림이었다.

그 초상화가 파리 살롱에 전시되었을 때, 시민들은 충격을 받았다. 왕비가 “속옷 같은 것”을 입고 있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그 모슬린은 프랑스의 영광이어야 할 실크가 아니라 영국의 면이었다. 프랑스 견직업계도, 국왕 재정을 담당하는 이들도 분노했다 — 왕비가 프랑스 산업을 외국 상품으로 배신하고 있다는 것이 그들의 판단이었다.

초상화는 곧 철거되었다. 그러나 이미지는 이미 퍼져 있었다. 복사본이 돌아다니고 풍자화가 그려지면서, 왕비의 흰 모슬린 드레스는 단순한 의상이 아니라 상징이 되었다. 사치의 상징, 외국인의 상징, 배신의 상징으로.

그녀가 자신이라고 믿었던 옷은 바깥에서 이미 다른 이름을 얻어 있었고, 그것은 그녀에 대한 새로운 음해의 시작에 불과했다.

흰 모슬린의 왕비
비제 르브룅의 1783년 초상화 양식. 마리 앙투아네트(28세)가 야외 정원 배경에 서 있다. 흰 모슬린 슈미즈 드레스, 허리에 파란 리본, 밀짚모자, 손에 장미 한 송이. 자연스러운 머리 — 파우더 없는 금발. 부드럽고 따뜻한 조명. 포즈는

궁정의 배신감

1780년대 초, 베르사유는 두 개의 파벌로 나뉘었다. 왕비를 중심으로 한 측근 — 폴리냑과 그의 친구들 — 과, 배제된 나머지. 배제된 귀족들은 살롱과 궁정의 복도에서 속삭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자잘한 것들이었다. 그녀의 사치, 취향, 말투 같은 것들이 도마에 올랐다. 그러나 속삭임은 점차 가혹해졌다. 이제 사람들이 묻는 것은 다른 것들이었다 — 왕비의 애인은 누구인가, 왕비는 왜 왕과 자주 함께 있지 않는가, 왕비가 오스트리아의 이익을 위해 무엇을 하고 있는가, 폴리냑과 랑발과 다른 여자들과 무엇을 하는가.

랑발 공녀 (Princesse de Lamballe, 1749~1792)본명은 마리-루이즈 드 사부아-카리냥. 사보이 왕가 출신으로 스무 살에 과부가 된 뒤 베르사유에 들어와 마리 앙투아네트의 가장 가까운 친구 중 하나가 되었다. 1774년 왕비의 가정 총감독관(Surintendante de la Maison de la Reine)에 임명되었다. 성격이 부드럽고 신중해 궁정에서 ‘결백한 측근’으로 통했으며, 폴리냑이 마리의 정치적 파벌을 결성했다면 랑발은 개인적 친밀감의 자리를 차지했다. 혁명 이후에도 왕비 곁을 떠나지 않다가 1792년 9월 학살 때 혁명 군중에 의해 참혹하게 살해되었고, 그 머리는 창에 꽂혀 탕플 감옥 창 아래까지 행진해 왔다는 기록이 있다.

이 시점에 마리는 이 모든 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녀는 트리아농에서 햄릿(Hameau de la Reine — 프티 트리아농 옆에 그녀가 지은 목가적 농장 마을 세트, ‘왕비의 촌락’이라는 뜻)을 짓고, 양을 키우고, 친구들과 차를 마시고, 아이들을 보았다. 그녀는 행복했다.

그리고 그 행복이 바로 모욕이었다. 궁정은 왕비가 자신들 앞에서 불행해야 하고, 자신들에게 의존해야 하며, 자신들의 의전을 필요로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왕비는 그 모든 것 없이 행복했고, 그것은 그들에게 인정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속삭임은 궁정의 복도에만 머물지 않았다. 그것은 문을 넘어갔다.

궁정의 속삭임
베르사유의 대 복도, 오후. 몇몇 귀족들이 기둥 뒤에서 소곤거리며 이야기한다. 여성 세 명, 남성 두 명. 약간 찡그린 표정, 냉소적 눈. 멀리 프레임 끝에 마리 앙투아네트의 작은 뒷모습 — 그녀는 이들이 무엇을 말하는지 모른다. 금박 벽, 차가운 햇빛.

파리의 소문

궁정의 속삭임은 곧 살롱에서 살롱으로, 카페에서 카페로 흐르며 파리 전체로 번져갔다. 파리 시민들은 왕비를 본 적도 없었고, 그녀가 어떤 여자인지도 알지 못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왕비에 대한 이야기”를 알고 있었다.

1780년대 초, 파리의 살롱과 카페에서 유통되던 왕비상은 명확했다. 그녀는 사치스럽고 외국인이었으며, 오스트리아를 위해 프랑스의 돈을 빼돌리고, 정숙하지 않으며, 왕을 무시하고 귀족을 경멸하는 여자였다.

이 중 단 하나도 사실이 아니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실제로는 검소했고, 프랑스를 사랑했고, 왕비로서의 의무를 다하려 노력했다. 그러나 사실 여부는 중요하지 않았다. 이야기는 이미 시작된 뒤였고, 시작된 이야기는 자기만의 생명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녀는 아이들과 트리아농에 있었다. 양을 키우고, 친구들과 차를 마시고, 흰 모슬린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바깥에서는 이미 다른 여자가 그녀 대신 자라고 있었다.

파리 카페의 소문
1780년대 초 파리의 카페 내부, 저녁. 몇몇 남자들이 테이블에 모여 서류와 소책자를 보며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한다. 촛불, 와인, 담배 연기. 한 남자가 손가락으로 종이를 가리킨다 — 종이에는 여왕의 캐리커처 비슷한 것이 그려져 있지만 세부는 보이지 않는다. 음모와 조롱이 섞인 분위기.

사료 노트

  • 1774년 5월 10일 루이 15세 승하: 천연두. 궁정의 관습대로 왕의 임종 순간 궁정 전체가 옛 왕을 버리고 새 왕에게로 달려가는 장면은 당대 기록과 Antonia Fraser, Marie Antoinette: The Journey (2001) 제7장, John Hardman, The Life of Louis XVI (2015)에 기록. 동시대 기록은 이 현상을 “천둥(coup de tonnerre)”에 비유하기도 한다
  • “하느님, 저희를 보호하소서. 저희는 너무 어려서 이 자리를 감당할 수 없습니다” 발언: 루이 16세 혹은 두 사람이 함께 한 기도로 전승되나, 정확한 발화자·표현의 진위는 논쟁이 있음. Fraser는 전승의 신빙성에 유보적 태도
  • 뒤 바리의 수도원 추방: 루이 15세 임종 직전 왕의 고해를 위한 교회의 의전 요구에 따른 절차. 뒤 바리는 이후 퐁토담(Pont-aux-Dames) 수도원에 격리됨
  • 1778년 첫 출산: 베르사유 관습으로 출산실에 수십 명 귀족이 입회. 이후 마리의 강력한 요청으로 이 관습이 이후 출산부터 축소됨 (Fraser 2001)
  • 비제 르브룅의 1783년 슈미즈 드레스 초상화: 현재 독일 헤센주 Darmstadt의 Schloss Wolfsgarten 소장, 디지털 아카이브 이용 가능
  • 폴리냑 가문에 대한 금전 지원 규모: Price 2003 및 Hardman 2015에서 과장·축소 양쪽 주장을 정리
  • 1780년대 초기 리벨의 존재: Chantal Thomas, The Wicked Queen (2001)이 초기 텍스트들을 수집·분석
  • “햄릿(Hameau de la Reine)”은 1783년 이후 조성. 동시대의 루소적 자연 회귀 취향의 산물이기도 하다
출처

이미지 출처

생성형 이미지: 본문에 사용한 생성형 이미지는 Midjourney로 제작했다.

본문 출처

Antonia Fraser, Marie Antoinette: The Journey (2001) — Chapters 7–14

Caroline Weber, Queen of Fashion: What Marie Antoinette Wore to the Revolution (2006)

John Hardman, The Life of Louis XVI (2015)

Chantal Thomas, The Wicked Queen (2001)

Madame Campan, Mémoires (1823)

Series

이야기가 죽인 여자 — 마리 앙투아네트

같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댓글

아직 댓글이 없어요. 이 이야기에 대한 첫 이야기를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