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사
마리 앙투아네트 · 2편

이야기가 죽인 여자
— 마리 앙투아네트

(2) 알프스를 넘다

이야기가 죽인 여자 — 마리 앙투아네트 (2) 알프스를 넘다

빈의 여자아이는 이름이 길었다. 마리아 안토니아 요제파 요한나 폰 합스부르크로트링엔.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의 열다섯 번째 자녀로 태어났고, 어머니는 이 소녀를 프랑스와의 동맹을 위한 정치의 도구로 삼았다. 유년기는 비교적 행복했으나 교육은 산만했다. 프랑스 동맹이 결정되고 결혼이 정해질 때까지, 그녀는 열네 살까지도 프랑스어를 제대로 쓰지 못했다. 어머니와의 관계는 엄격하고 감정적으로 멀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그녀를 무기로 키웠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랑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다만 사랑은 정치 뒤에 숨겨져 있었다.

1769년 여름, 결혼이 공식 결정되었다. 1770년 2월, 빈의 슈테판 대성당에서 대리 결혼식이 거행되었다. 페르디난드 공작이 루이 오귀스트의 대리인이 되어 열네 살의 신부 옆에 섰다. 새로운 이름이 주어졌다. 마리 앙투아네트. 마리는 이때 법적으로 프랑스의 왕세자비가 되었다.

그리고 두 달 후 4월 20일, 그녀는 빈을 떠나 라인 강으로 향했다.

대리 결혼식 (Mariage par procuration)신랑 없이 대리인을 세워 치르는 혼례. 법적 효력은 정식 결혼식과 동일하다. 당시 유럽 왕실간 혼인에서 흔한 절차였는데, 이유는 두 가지다. 첫 번째는 정치적 이유다. 왕실 혼인은 정치적 협상의 의미를 포함했으니 체결 시점이 중요했다. 그런데 신랑이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나라에서 직접 오려면 몇 달이 걸린다. 오가는 사이 협상이 틀어지거나 한쪽이 뒤집을 수 있으니 법적으로 먼저 묶어두는 것이다. 게다가 당시 오스트리아와 프랑스는 수백 년 앙숙관계에서 동맹을 체결한 지 얼마 안 된 시점으로, 테레지아 입장에서는 딸이 조기에 결혼을 확정 짓는 것이 중요했다. 두 번째는 의전상 이유다. 대리 결혼식을 치른 순간부터 신분이 확정되므로, 프랑스 측이 왕세자비격에 맞는 의전으로 마리를 모셔갈 수 있었다. 라인 강의 인도 의식도 이 지위를 전제로 이루어진 것이다. 본 결혼식은 두 달 뒤인 5월 16일, 베르사유에서 루이 오귀스트와 직접 올렸다.
빈에서의 이별
1770년 4월 빈 궁전 계단에서 마리아 안토니아를 안아주는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 딸은 이별의 순간을 견뎌내고, 어머니는 오스트리아 제국의 지배자로서 감정을 억제한다.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와 딸 마리 앙투아네트

베르사유의 첫 아침

5월 16일, 베르사유 궁전에서 성대한 결혼식이 거행되었다. 궁정의 전력이 동원되었다. 그러나 그날 밤, 루이 15세 광장 근처에서 불꽃놀이 중 군중들이 쓰러지고 133명이 압사했다. 사람들은 나쁜 징조다, 신부에게 불운을 데려오는 불꽃이라고 수군거렸다.

첫날밤은 미완성으로 끝났다. 루이 오귀스트는 15세였고, 신체는 아이였다. 성적 발달이 늦었다. 의학적 원인이 있었는지, 심리적 불안이 있었는지는 역사가들도 추측할 뿐이다. 기록에 의하면 이 부부의 육체적 관계는 7년을 기다려야 했다.

아침이 왔다. 베르사유의 왕비는 치장을 해야 했다. 이것을 ‘toilette(화장하기)’라고 불렀다. 수십 명의 귀족이 침실에 들어왔다. 오스트리아에서 온 열네 살 소녀는 속옷 차림으로 의자에 앉았다. 가장 높은 신분의 여성이 슈미즈(chemise)를 건네주었다. 다른 여성들이 다음 옷을 기다리며 떠들었다. 모든 것이 한없이 느렸다.

오스트리아의 궁정도 화려했지만, 프랑스는 또 다른 것이 있었다. 이곳은 자신의 몸은 물론 입었던 옷, 속옷, 피부까지도 공공의 물건인 곳이었다.

베르사유의 아침 치장
베르사유 왕비 침실, 속옷 차림의 마리가 의자에 앉아 있고 주변을 귀족 여성들이 둘러싸고 있다. 가장 높은 신분의 여성이 슈미즈를 건네주고 있으며, 수십 개의 촛불과 거울들이 장면을 무한히 반사시킨다.

루이 오귀스트라는 사람

마리의 남편 루이 오귀스트는 나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친절했다. 지적 호기심도 있었다. 성실했다. 그러나 결정적이지 못했다. 남편이 되기에는 준비되지 않았고, 왕이 되기에는 더욱 그러했다.

그가 가장 좋아한 것은 자물쇠 제작과 사냥이었다. 궁정의 일보다 작업장에서 느끼는 손의 감각이 더 현실적이었다. 자물쇠의 톱니는 거짓이 없었다. 톱니는 맞거나 안 맞거나, 둘 중 하나였다.

그의 일기에는 “Rien(아무것도 없음)”이라는 단어가 반복된다. 역사가들은 이를 “왕으로서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는 뜻으로 읽었다. 그러나 더 정확한 해석은 이것이다: 사냥에서 잡은 것이 없었다는 뜻이었다. 그것이 그의 삶 전체를 설명하는 기호였다. 무언가를 쫓지만 잡지 못하는 삶.

루이 오귀스트의 작업장
19세 루이 오귀스트가 자물쇠 작업장에서 도구를 쥔 채 집중하고 있다. 기름진 손, 온화한 얼굴, 평범한 가구와 촛불로 둘러싸인 공간. 궁전이 아닌 일반 기술자의 작업실처럼 보인다.

7년 동안 부부관계가 없었다

1770년부터 1777년까지, 부부 사이에는 육체적 관계가 없었다.

이것은 왕실의 비밀이 아니었다. 궁정 전체가 알고 있었다. 파리의 시민들도, 외국 대사들도, 심지어 영국의 스파이들도 알고 있었다. 이 문제는 외교 보고서에 올랐다. 프랑스 왕비가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사실이, 국제 정치의 하나의 이슈가 되었다.

마리에게 이것은 두 배의 고통이었다. 첫째, 왕비가 임신하지 않는 것은 정치적 실패였다. 프랑스는 왕세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둘째, 그 이유가 마리에게 있다고 모두가 믿었다.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는 거의 매달 편지를 보냈다. ‘네 의무를 다하라.’ 그 다섯 글자만으로 충분했다. 딸이 이해할 것을 알았다. 왕실의 혼인은 국가적 사명이고, 왕비의 첫 번째 임무는 후계자를 낳는 것이라는 뜻이었다.

밤마다 마리는 루이의 침실로 갔다. 밤마다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녀는 베르사유의 거울의 방을 혼자 걸었다. 수백 개의 촛불이 있었고, 바닥은 반사되었고, 천장은 하늘처럼 멀었다. 그 광활한 공간 속에서 그녀는 매우 작았다. 그리고 혼자였다.

거울의 방에서
밤의 베르사유 거울의 방, 혼자 걷는 작은 여성의 실루엣. 수백 개의 촛불, 반사되는 마루, 무한한 천장. 광활한 공간 속의 고독.

왕세자비는 창녀에게 말을 걸 수 없다

루이 15세는 그의 손녀 며느리(루이 15세의 아들 루이 페르디낭이 일찍 죽었기에 그의 아들 오귀스트는 루이 15세에게는 손자가 된다)에게 뒤 바리 백작부인을 소개했다. 그녀는 루이 15세의 공식 정부(maîtresse-en-titre)였는데, 창녀 출신이었다.

당시 궁정 예법상 왕비급 인물은 국왕의 정부에게도 최소한의 인사를 해야 했다. 게다가 당시 뒤 바리는 왕의 총애를 받는 베르사유의 실질적인 권력이었다. 귀족들은 모두 그녀에게 잘 보이려고 애를 썼다. 그녀는 사실상 왕 다음 가는 실력자였다.

루이 15세는 “이 여자가 내 정부다, 인정하고 먼저 말을 걸어라”는 의미로 마리에게 그녀를 소개했다.

마리는 그녀에게 말을 건네기를 거부했다. 오스트리아 황제의 딸이자 프랑스의 왕세자비가 창녀에게 먼저 말을 걸라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뒤 바리는 왕의 총애를 받는 여자이자 공인된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 마리가 뒤 바리를 무시한다는 것은, 루이 15세의 입장에서는 자신을 무시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그렇게 18개월이 지났다.

프랑스 왕의 불쾌함은 외교 문제가 되었다. 오스트리아는 프랑스와의 동맹을 유지해야 했고, 그 동맹은 전적으로 루이 15세의 의지에 달려 있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딸에게 편지를 보냈다. 명령이 담긴 편지였다.

마리는 결국 궁전의 계단에서 뒤 바리를 만났다. 긴 침묵 위에, 마리는 단 한 문장을 건넸다.

“오늘 베르사유에 사람이 많네요.”

그것으로 두 나라의 외교적 위기는 봉합되었다.

이것이 마리가 배운 첫 정치였다. 자신이 옳다고 믿은 원칙을 지키는 것과, 그것이 어떻게 정치적 약점으로 돌아오는지 사이의 거리. 열네 살의 소녀는 이 거리를 정확히 측정할 수 없었다. 그녀는 원칙을 택했다. 어머니의 명령이기에 따랐을 뿐이었다.

정치는 원칙을 기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아직 몰랐다. 나중에 그것이 생사를 나눌 차이라는 것도 그때는 몰랐다.

뒤 바리와의 인사
베르사유 대연회장 계단에서 마주선 14세 마리와 뒤 바리 백작부인. 마리는 윗부분에, 뒤 바리는 아래쪽에. 두 여성 사이의 긴장이 주변 귀족들의 숨죽임으로 둘러싸여 있다.

사료 노트

이 편의 핵심 장면들은 다음 사료로 확인된다.

인도 의식의 세부 절차는 Antonia Fraser의 Marie Antoinette: The Journey (2001) 제2장에서 재구성했다. 특히 벗겨지는 순서, 옷과 장신구의 목록, 개인 반려동물까지 돌려보낸 사실 등이 기록되어 있다.

결혼식 당일 밤의 루이 15세 광장(현 콩코드 광장) 불꽃놀이 압사 사건은 역사적 아이러니를 담고 있다. 133명이 압사한 그 광장이 바로 23년 뒤 마리의 처형 장소가 된다. 당대 기록은 이 사건을 불길한 전조로 기술했다.

루이 오귀스트의 일기에서 반복되는 “Rien(아무것도 없음)”은 오랫동안 왕의 게으름이나 무능함의 증거로 읽혔다. John Hardman의 The Life of Louis XVI (2015)는 이를 재해석했다. 대부분의 항목이 사냥 일지였고, 그날 잡은 것이 없었다는 뜻이었다. 현재는 여러 학자들이 이 해석에 동의한다.

7년간의 미완성된 혼인의 원인은 다양한 가설이 있었다. 포경수술설, 호르몬 이상설, 심리적 거부감설. 사료는 그 어떤 것도 결정적으로 뒷받침하지 않는다. Stefan Zweig의 Marie Antoinette (1932)는 루이의 성격적 소심함에 초점을 맞췄다. 현대 연구자들—특히 Fraser와 Hardman—은 심리적·발달적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을 가능성에 무게를 둔다. 루이는 단순히 왕이 되기 싫었던 것처럼, 남편이 되기도 싫었던 것처럼 보인다.

뒤 바리 에피소드는 당대 회고록과 서한으로 교차 확인된다. Madame Campan의 Mémoires sur la vie de Marie-Antoinette (1823)과 Besenval의 회고록이 기본 텍스트이고, 마리아 테레지아와 Mercy-Argenteau 대사 사이의 서신 기록이 외교적 맥락을 보완한다. 그 한 문장 “오늘 베르사유에 사람이 많네요”는 Campan의 기억에서 비롯되었다. 정확한 표현의 진위는 논쟁의 여지가 있지만, 18개월의 대치와 그 해결이라는 사실 자체는 확인된다.


출처

이미지 출처

생성형 이미지는 Google Gemini로 제작했다.

본문 출처

Antonia Fraser, Marie Antoinette: The Journey (2001) — Chapters 1–4

Stefan Zweig, Marie Antoinette (1932) — 유년·혼인·초기 궁정 생활

John Hardman, The Life of Louis XVI (2015)

Madame Campan, Mémoires sur la vie de Marie-Antoinette (1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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