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의 마지막에서 우리는 하나의 숫자를 남겨두었다. 그 전쟁 동안 팔레스타인 아랍인 약 70만 명이 살던 곳에서 사라졌다. 이스라엘에게 1948년은 2천 년의 유랑을 끝낸 독립의 해였지만, 같은 14개월이 팔레스타인 아랍인에게는 고향을 잃은 대재앙이었다. 그들은 그 사건을 나크바(Nakba), 아랍어로 “대재앙”이라 부른다.
이 마지막 편은 그 70만 명이 어디로, 어떻게 사라졌는지, 그리고 왜 지금까지도 돌아가지 못하는지를 따라간다. 승리의 이야기를 뒤집으면 나오는 다른 얼굴이다.
제1장: 하나의 사건, 두 개의 이름
같은 14개월을 두고 두 민족은 정반대의 이름을 붙였다. 한쪽에게 그것은 독립 전쟁(War of Independence)이었다. 5개국의 침공을 맨손에 가까운 상태로 막아내고 국가를 지켜낸 기적의 서사다. 다른 한쪽에게 그것은 나크바, 곧 대재앙이었다. 조상 대대로 살던 마을에서 뿌리 뽑혀 난민이 된 원년(元年)이다.
두 이름은 같은 사건의 두 얼굴이다. 한 민족의 건국 서사가 다른 민족의 상실 위에 세워졌다는 사실, 바로 그 겹침이 이 분쟁을 단순한 국경 다툼이 아니라 정당성의 문제로 되돌린다. 이 편은 그중 오랫동안 덜 이야기된 쪽, 사라진 사람들의 얼굴을 본다. 그것이 다른 쪽 서사를 지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두 얼굴을 함께 보아야 1948년이라는 사건의 온전한 크기가 보이기 때문이다.
제2장: 떠남의 두 얼굴
70만 명이 하루아침에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 이탈은 전쟁의 국면에 따라 성격이 달랐고, 여기서부터 역사가들의 해석이 크게 갈린다.
첫 번째 국면은 1947년 말부터 1948년 5월까지의 내전기였다. 3부에서 본 예루살렘 서쪽 마을 데이르 야신(Deir Yassin)의 학살 소문이 팔레스타인 전역으로 퍼지면서, 공포에 질린 아랍 주민들이 스스로 마을을 떠나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 닥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도시와 농촌을 가리지 않고 번졌다. 하이파와 야파 같은 대도시의 아랍 인구가 전쟁이 공식적으로 시작되기도 전에 빠져나간 것도 이 시기였다.
두 번째 국면은 1948년 5월 이후, 국가 간 전쟁이 시작되고 특히 그해 여름 1차 휴전이 끝난 뒤였다. 이 시기의 이탈은 성격이 달랐다. 전열을 정비한 이스라엘군이 공세로 전환하면서, 일부 지역에서는 주민의 자발적 도피가 아니라 군의 강압적 추방으로 사람들이 마을을 비웠다. 자발적 피난과 강제 추방의 경계는 지역마다, 사건마다 달랐다.
바로 이 지점이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역사 논쟁의 핵심이다. 한쪽 해석은 이 이탈이 처음부터 조직적으로 계획된 추방, 곧 “인종 청소”에 가까웠다고 본다. 다른 쪽 해석은 대부분이 전쟁의 혼란 속에서 벌어진 자발적 도피였으며 조직적 추방 계획은 없었다고 본다. 이스라엘의 이른바 “신(新)역사학파”가 1980년대 이후 공개된 문서들을 근거로 강제 추방의 비중을 크게 높여 잡으면서, 이 논쟁은 학문의 영역을 넘어 두 민족의 정체성이 걸린 문제가 됐다.

제3장: 리다와 람레 — 여름의 행진
3부에서 우리는 이스라엘군이 1948년 7월 공세에서 리다(Lydda)와 람레(Ramle)를 점령했다는 사실까지 보았다. 두 도시는 텔아비브와 예루살렘을 잇는 길목에 있어 전략적으로 중요했다. 그 점령 이후 그곳 주민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가 나크바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장면이다.
리다와 람레는 다니 작전(Operation Dani)의 목표였다. 7월 중순, 이스라엘군이 리다에 진입하는 과정에서 격렬한 시가전이 벌어졌고, 짧은 시간에 100명이 넘는 아랍인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전해진다. 도시가 장악된 뒤, 리다와 람레의 아랍 주민 대부분에게 마을을 떠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여러 사료가 전하는 추방 인원은 5만에서 7만 명 사이다. 짐을 제대로 챙길 틈도 없이, 사람들은 동쪽 요르단 전선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하필 한여름이었고, 무슬림의 라마단 금식 기간이었다. 식수도 식량도 부족한 채로 수십 킬로미터를 걸어야 했던 이 행렬에서 노약자와 어린이 다수가 탈진과 갈증으로 쓰러졌다. 후대에 이 행렬은 “죽음의 행진”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이 사건은 나크바의 성격 논쟁에서 특히 자주 인용된다. 리다·람레의 추방이 상부의 명시적 명령에 따른 것이었는지, 아니면 전황 속에서 현장 지휘관들이 내린 판단이었는지를 두고도 해석이 갈린다. 다만 대규모 인구가 군의 지시로 도시를 비웠다는 사실 자체는 대체로 인정된다. 숫자와 책임 소재의 세부는 사료마다 다르지만, 두 도시가 순식간에 텅 비었다는 결과는 다르지 않다.
제4장: 지도에서 지워진 마을들
전쟁이 끝났을 때 남은 것은 사람이 사라진 자리였다. 팔레스타인의 여러 해안 도시 — 야파, 하이파, 아크레 — 에서 아랍 원주민 인구가 대부분 빠져나갔고, 농촌에서는 수백 개의 마을이 통째로 비었다. 팔레스타인 출신 역사가 왈리드 할리디(Walid Khalidi)의 연구를 비롯한 인구통계 조사들은 이 시기 파괴되거나 주민이 사라진 아랍 마을의 수를 최소 400여 개에서 500개 이상으로 집계한다.
빈 마을은 그대로 남지 않았다. 주민이 떠난 집과 올리브 과수원, 오래된 묘지 위에 새로 도착한 유대인 이민자들의 정착촌이 들어섰다. 이스라엘로 귀속된 팔레스타인인 소유의 토지는 수백만 두눔(dunum)에 이르렀고, 이는 그때까지 시오니스트들이 수십 년에 걸쳐 사들인 땅을 여러 배 웃도는 규모였다. 아랍어 지명 다수가 히브리어 지명으로 바뀌면서, 어떤 마을들은 물리적으로만이 아니라 지도 위에서도 이름을 잃었다.
이 “지우기”를 두고도 평가는 갈린다. 어떤 역사가들은 이것을 조직적인 “인종 청소”의 증거로 읽고, 다른 역사가들은 전쟁의 승자가 영토를 재편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일로 본다. 어느 해석을 택하든, 한 사회가 살던 물리적 흔적의 상당 부분이 몇 년 사이에 사라졌다는 사실은 남는다.
제5장: 돌아가지 못한 사람들
전쟁을 피해 국경을 넘은 70만여 명은 요르단, 레바논, 시리아 같은 이웃 아랍 국가로, 그리고 요르단이 관할하게 된 서안지구와 이집트가 관할하게 된 가자지구의 임시 천막촌으로 흩어졌다. 이 거대한 인도적 위기를 감당하기 위해 1949년 12월, 유엔 총회는 유엔 팔레스타인 난민 구호 기구(UNRWA)를 세웠다.
천막을 받아 든 사람들은 전쟁이 끝나면 곧 집으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정부는 이들의 귀환을 허용하지 않았다. 대규모 아랍 인구가 돌아오면 유대 국가의 인구 구성 자체가 흔들린다는 판단, 그리고 안보 우려가 그 배경이었다. 돌아갈 수 없게 되자 임시 천막은 세월과 함께 콘크리트 지붕으로 바뀌었고, 요르단·레바논·시리아·가자·서안 곳곳의 난민 캠프는 수십 년째 그 자리에 남았다. 1950년 무렵 75만 명 수준이던 등록 난민은 세대를 거듭하며 오늘날 500만 명을 훌쩍 넘어섰다.
바로 여기서 오늘날까지 풀리지 않는 문제가 자라났다. 팔레스타인 측이 요구하는 난민의 귀환권(Right of Return)과,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이스라엘의 입장은 지금도 평화 협상의 가장 단단한 매듭이다. 한쪽에게 귀환권은 빼앗긴 고향으로 돌아갈 당연한 권리이고, 다른 한쪽에게 그것은 유대 국가의 존립을 인구 구성으로 무너뜨리는 요구다. 두 입장 사이에 아직 다리는 놓이지 않았다.

에필로그: 두 개의 기억, 하나의 땅
이렇게 네 편에 걸친 이야기가 끝에 닿았다. 1부에서 우리는 한 땅 위에 겹쳐진 두 통의 편지를 보았다. 2부에서는 그 겹침이 통곡의 벽과 헤브론과 아랍 대반란을 거치며 두 민족을 갈라놓는 과정을 보았다. 3부에서는 신생 이스라엘이 5개국의 침공 속에서 국가를 지켜낸 14개월을, 그리고 4부에서는 그 승리의 이면에서 사라진 70만 명을 보았다.
1948년의 전쟁은 인류사에서 보기 드문 제로섬의 비극이었다. 한 민족에게 그것은 2천 년 유랑을 끝낸 기적의 건국이었고, 같은 사건이 다른 민족에게는 고향과 정치적 미래를 함께 잃은 파국이었다. 한쪽의 가장 큰 성취가 다른 쪽의 가장 큰 상실과 정확히 포개진다. 그래서 이 분쟁은 어느 한쪽의 서사만으로는 결코 온전히 설명되지 않는다.
오늘날 가자지구와 서안지구에서 이어지는 충돌, 그리고 끝나지 않는 귀환권 논쟁은 최근에 생겨난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제국의 어긋난 약속에서 시작해, 두 민족주의의 충돌을 지나, 1948년의 건국과 나크바에서 뇌관이 심어진 오래된 상처의 연장선이다. 1948년의 전쟁은 정전 협정으로 멈췄을 뿐, 그것이 남긴 질문 — 두 민족이 하나의 땅을 어떻게 나눌 것인가 — 은 한 번도 답을 얻지 못한 채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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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성형 이미지: 출처가 표기되지 않은 이미지는 Midjourney로 제작했다.
본문 출처
Walid Khalidi, 『All That Remains』 — 파괴·인구 이탈된 팔레스타인 마을 조사
Benny Morris 등 이스라엘 신역사학파의 1948년 난민 문제 연구
UN UNRWA 통계 및 유엔 총회 결의 194호(1948)
유엔 총회 결의 181호 및 1949년 로도스 정전 협정 관련 자료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Journal of Palestine Stud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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