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걸음 남겨둔 천하제패
15세기 오닌의 난 이후 일본은 이른바 전국시대로 돌입했다. 교토에는 천황과 쇼군이 있었지만, 그 권위는 지방까지 닿지 않았다. 다이묘들은 제 땅에서 제 법으로 싸웠고, 절은 신앙의 공간이면서 동시에 무장 세력이었고, 상인들은 전쟁을 따라 붙으며 돈을 벌었다. 나라 전체가 백 년 넘게 끓고 있었다.

그 펄펄 끓는 판에서 가장 빨리 선두에 선 사람이 오다 노부나가였다. 교토에 입성하고, 마지막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몰아내며 무로마치 막부를 끝냈다. 히에이산 엔랴쿠지를 불태우고, 이시야마 혼간지를 굴복시키고, 다케다 가문까지 무너뜨렸다. 아직 서쪽의 모리, 북쪽의 우에스기 같은 적이 남아 있었지만, 이미 승부는 거의 끝난 것처럼 보였다. 이제 누가 천하를 잡느냐가 아니라, 노부나가가 언제 마지막 마침표를 찍느냐만 남은 상황이었다.

처음으로 이름을 알린 1560년 오케하자마 전투부터 다케다 가문이 멸망하는 1582년까지 — 노부나가는 여기까지 오는 22년 동안 동시대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결정적인 장면들을 만들어왔다.
| 연도 | 결정적 장면 |
|---|---|
| 1560 | 오케하자마 — 이마가와 요시모토 격파, 무명에서 이름을 얻다 |
| 1568 | 교토 입성,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쇼군에 옹립 |
| 1571 | 히에이산 엔랴쿠지 학살·방화 |
| 1573 | 무로마치 막부 종결 — 요시아키 추방 |
| 1575 | 나가시노 — 다케다 기마대 궤멸 |
| 1580 | 이시야마 혼간지 화의 — 10년 전쟁이 끝나다 |
| 1582 3월 | 다케다 가문 멸망, 천하 통일 코앞 |

그런데 천하통일을 눈 앞에 둔 1582년 초여름의 공기는 묘하게 느슨했다. 하시바 히데요시는 서쪽 빗추 다카마쓰에서 모리와 싸우고 있었고,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승자 편 손님처럼 교토와 사카이를 드나들고 있었다. 노부나가는 사방에 군대를 뻗쳐놓고 정작 본인은 전장에서 한발짝 떨어져 있었다.
그 무렵 비와 호수(琵琶湖, 교토 동쪽의 거대한 담수호) 북쪽의 산 위에는 검은 탑 하나가 저녁빛을 먹고 서 있었다. 아즈치 성이었다. 그곳의 주인이 오다 노부나가였다. 1582년 기준으로 마흔여덟 살. 전국시대 첫번째 천하인(天下人)이었다.

천황의 방, 그 위의 방

아즈치 성에 올라가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을 것은 크기였을 것이다. 돌벽은 높고, 천수각은 지나치게 크고, 금박 장식은 해 질 녘에도 번들거렸을 것이다. 정말 기묘한 것은 장식이 아니라 배치였다. 성에는 천황이 머무를 ‘어행의 방’이 있었다. 보통이라면 그 방이 가장 높은 자리여야 했다. 그런데 노부나가는 그보다 더 높은 곳에 자기 거처를 놓았다. 천황을 모셔놓고, 그 위에 자기가 앉는 구조였다.
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스는 이 성을 보고 경탄을 기록했다.
성의 구조는 매우 거대하고 정교하였으며, 그 화려함과 정교함은 유럽의 왕궁과 비교해도 결코 뒤떨어지지 않았고, 오히려 여러 점에서 우월하였다.
프로이스는 화려함을 칭찬했지만, 아즈치 성의 진짜 오만은 금박이 아니라 배치에 있었다. 일본의 질서에서 천황은 위에 있고, 쇼군과 다이묘는 그 아래에 있어야 했다. 그런데 이 성에서는 그 순서가 뒤집혀 있었다. 노부나가는 말로 선언하지 않고 건물로 선언했다. “나는 천황보다 위에 있는 사람“이라고.

스스로 신이 된 사람
성 안에는 소켄지(摠見寺)라는 절이 있었다. 그 절에 들어가 절을 하면 부처가 아니라 노부나가가 절을 받았다. 그는 자기 몸을 신체(神體)로 모시게 했고, 다이묘와 가신들에게 그 앞에 엎드리게 했다.
그를 참배하는데 100문이 필요했다. 노부나가는 살아 있는 동안 스스로를 신으로 만들었을 뿐 아니라, 그 신앙의 입장료도 받았다. 시주도 아니고 헌금도 아니었다. 권력이 자기 자신을 숭배하는 데 요금을 매긴 셈이었다.
프로이스는 이 광경을 기록했다.
노부나가는 자기가 세상의 유일한 주인이자, 그리고 신이라고 믿었고,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그를 신으로 섬기도록 하였다.
이쯤 되면 노부나가는 천황을 흉내내서 쫓아가려는 것도 아니고, 부처님의 권능으로 자신을 치켜세운 것도 아니다. 천황과 부처보다 높은 존재가 되고 싶어했다.

나는 제육천마왕이올시다
9년전으로 시간을 돌려보자. 1573년, 노부나가는 다케다 신겐에게 보내는 편지의 서명란에 자기 이름 대신 다른 이름을 적었다. “제육천마왕.” 직접 써넣은 자기 규정이었다.

제육천마왕은 불교 우주론에서 욕계 육천의 맨 위, 타화자재천을 다스리는 존재였다. 그런데 동시에 마라(魔羅), 곧 수행을 흐트러뜨리고 인간을 욕망에 붙잡아두는 적이기도 했다. 남의 기쁨을 빼앗아 자기 것으로 삼는 자. 욕계의 정점에 앉아 있으되 빛이 아니라 어둠 쪽에 선 왕.
실제로 마왕이라는 말은 허세가 아니라 자백에 가까웠다. 그 이름을 쓰기 2년전인 1571년, 그는 히에이산 엔랴쿠지를 불태웠고 수많은 승려와 난민을 죽였다. 1574년에는 나가시마 일향종 세력을 포위해 다시 불로 끝장을 냈다. 종교가 무장 세력이기도 했던 시대였지만, 그래도 그가 택한 방식은 유난히 잔인하고 철저했다. 그는 사찰을 굴복시키는 데서 멈추지 않고 사찰이 기대고 있던 권위 자체를 태워버렸다. 그러고 나서 자기 이름 옆에 제육천마왕을 적었다. 멋을 부린 서명이 아니라, 자기가 무슨 존재가 되어가고 있는지 알고 있다는 서명이었다.


마왕이 가신을 부수는 법
자기 자신을 부처 위에 모신 사람은, 자기 옆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마음껏 칼을 휘둘렀다. (심판할 존재가 없었으니까) 노부나가가 적과 싸운 방식은 익히 알려져 있지만, 그가 부하와 천황을 다루는 방식 역시 그 못지않게 잔혹했다. 천하제패가 가까워 올수록 칼끝은 점점 안쪽으로 향했다.
마쓰나가 히사히데(松永久秀)는 다섯 번이나 주군을 갈아탄 노련한 다이묘였다. 1577년, 그가 또 한 번 배반의 깃발을 들었을 때 노부나가는 군대를 보내 그를 시기산 성에 가뒀다. 항복의 조건으로 노부나가는 그가 평생 소장해온 명물 차솥 히라구모(平蜘蛛釜)를 넘기라고 요구했다고 전한다. 마쓰나가는 거부했다. 전승에 따르면 그는 이 솥을 산산이 깨뜨린 뒤 성에 불을 지르고 그 안에서 죽었다. 항복하는 대신, 자신이 가진 명물과 최후의 선택을 모두 가루로 만든 셈이었다.

이 히라구모 솥은 쓰쿠모 나스와 다른 물건이다. 쓰쿠모 나스는 1568년 이미 노부나가에게 헌상된 뒤였다. 혼노지의 불길에서 한 번 타고 잿더미에서 회수된 쓰쿠모 나스는 훗날 오사카성의 불길 속에서 다시 산산이 부서졌고, 이에야스가 잿더미에서 파내 옻으로 접합해 복원했다고 전한다. 지금은 세이카도 문고 미술관에 남아 있다. 한 물건이 세 사람의 권력과 두 번의 몰락을 통과한 셈이다.
3년 뒤 1580년 8월, 30년 가까이 봉직해온 최고참 가신 사쿠마 노부모리가 별안간 추방당했다. 명목은 이시야마 혼간지 공략의 부진. 노부나가는 직접 붓을 들어 19개 조항의 추방장을 적어 보냈다 — 무능, 게으름, 사익 추구, 부하 관리 실패. 30년의 공이 19줄의 비난으로 정리되었다. 사쿠마는 고야산으로 출가했고, 그곳에서 곧 죽었다.

이 사건이 가신단을 얼어붙게 한 이유는 단순했다. 사쿠마가 무슨 죄를 지어 잘렸는가가 아니었다. 노부나가가 마음먹으면 30년의 공도 한 장의 종이로 끝낼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옆자리에 앉은 사람이 자기 차례를 셈하기 시작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천황도 마왕 아래다
가신만이 칼끝의 대상이 아니었다. 1581년 무렵부터 노부나가는 오기마치 천황(正親町天皇)에게 양위를 종용하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천황을 다음 사람으로 갈아치우는 일을 다이묘가 직접 압박한 것이다. 일본 질서의 정점에 누구를 앉힐지를, 그 정점 아래에 있는 자가 결정하려 들었다.

아즈치 성 배치에서 시작된 “천황을 발 아래 두는 구조”가, 이번엔 사람을 직접 옮기는 단계로 넘어가고 있었다. 자기를 신으로 모시게 했고, 마왕이라는 이름으로 자기를 규정했고, 30년 가신을 종이 한 장으로 추방했고, 이제 천황까지 자기 손으로 옮기려 했다. 위로도 옆으로도 안전한 자리는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사료 노트
- 마쓰나가 자폭 일화: 1577년 시기산 성 함락 때 마쓰나가 히사히데가 명물 히라구모 솥을 깨뜨리고 성에 불을 질러 죽었다는 이야기는 『신장공기』와 후대 군기물에 걸쳐 전해진다. 다만 솥을 끌어안고 화약과 함께 폭사했다는 세부는 후대의 극적 각색이 강하며, 사료마다 묘사가 다르다.
- 쓰쿠모 나스의 두 번의 화재: 쓰쿠모 나스는 1568년 노부나가에게 헌상된 뒤 1582년 혼노지에서 불타고, 1615년 오사카성 함락 때 다시 불탄 것으로 전해진다. 이후 이에야스의 명령으로 옻칠 접합 복원되었으며 현재 세이카도 문고 미술관이 소장한다. 마쓰나가의 히라구모 솥과는 다른 물건이다.
- 사쿠마 추방장: 1580년 8월 노부나가가 사쿠마 노부모리에게 보낸 19개조 추방장은 1차 사료에 비교적 잘 남아 있는 편으로, 본문은 『신장공기』 등에서 확인 가능하다. 가신 통치의 대표 문서로 평가된다.
- 천황 양위 압박: 1581~82년 노부나가가 오기마치 천황에게 양위를 종용했다는 이야기는 동시대 일기·문헌에 단편적으로 등장하나, 양위 요구의 강도와 시점에 대해서는 학자들마다 해석이 갈린다.
출처
이미지 출처
생성형 이미지: 본문에 사용한 생성형 이미지는 Midjourney로 제작했다.
본문 출처
太田牛一 『信長公記(신장공기)』 — 노부나가의 행적을 기록한 핵심 1차 사료. 사쿠마 추방장 원문, 가신 처우, 아즈치 성 관련 기록 참조.
ルイス・フロイス 『日本史(Historia de Japam)』 — 포르투갈 예수회 선교사가 직접 목격·기록한 동시대 자료. 아즈치 성 묘사와 소켄지 참배 장면 인용 출처.
谷口克広 『信長と消えた家臣たち — 失脚・粛清・謀反』 洋泉社, 2009 — 가신단 추방·숙청 사례를 사료 기반으로 재구성한 연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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