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중세사
혼노지의 변 · 1편

어쩔 수 없구나
— 혼노지의 변

(1) 노부나가는 어떻게 마왕이 됐나

어쩔 수 없구나 — 혼노지의 변 (1) 노부나가는 어떻게 마왕이 됐나

한 걸음 남겨둔 천하제패

15세기 오닌의 난 이후 일본은 이른바 전국시대로 돌입했다. 교토에는 천황과 쇼군이 있었지만, 그 권위는 지방까지 닿지 않았다. 다이묘들은 제 땅에서 제 법으로 싸웠고, 절은 신앙의 공간이면서 동시에 무장 세력이었고, 상인들은 전쟁을 따라 붙으며 돈을 벌었다. 나라 전체가 백 년 넘게 끓고 있었다.

전국시대의 혼란
전국시대를 그린 3폭 병풍 구도의 삽화. 왼쪽 폭에는 두 다이묘 군대가 진흙탕 벌판에서 충돌한다 — 교차하는 깃발, 창을 든 기마 무사들의 격렬한 움직임. 가운데 폭에는 무장한 승병들이 요새화된 사찰 문 앞을 지키고 서 있다 — 나기나타를 든 승려들, 뒤로 사찰 지붕과 피어오르는 향 연기. 오른쪽 폭에는 전투가 지나간 자리에서 상인들이 등불 아래 웅크려 버려진 갑옷과 무기를 바구니에 골라 담고 있다. 세 장면은 얇은 금박 테두리로 나뉘어 한 폭의 병풍처럼 이어진다.
다이묘는 다이묘대로, 승려는 승려대로, 상인은 상인대로 각자의 살길을 찾았다. 힘의 공백이 낳은 처절한 투쟁의 시간이었다.
오닌의 난(応仁の乱, 1467~1477)무로마치 막부 쇼군 후계자 분쟁을 계기로 유력 다이묘들이 두 진영으로 나뉘어 싸운 10년간의 내란. 교토가 전쟁터가 되어 황폐해졌고 막부의 권위가 완전히 무너졌다. 이후 각지 다이묘들이 독자적 지배권을 강화하며 전국시대로 돌입했다.

그 펄펄 끓는 판에서 가장 빨리 선두에 선 사람이 오다 노부나가였다. 교토에 입성하고, 마지막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몰아내며 무로마치 막부를 끝냈다. 히에이산 엔랴쿠지를 불태우고, 이시야마 혼간지를 굴복시키고, 다케다 가문까지 무너뜨렸다. 아직 서쪽의 모리, 북쪽의 우에스기 같은 적이 남아 있었지만, 이미 승부는 거의 끝난 것처럼 보였다. 이제 누가 천하를 잡느냐가 아니라, 노부나가가 언제 마지막 마침표를 찍느냐만 남은 상황이었다.

첫 번째 천하인, 오다 노부나가
촛불이 켜진 밤의 전국시대 전쟁 회의실. 지도와 문서가 놓인 낮은 탁자 앞에 오다 노부나가가 앉아 있고, 갑옷 입은 가신들이 둘러서 있다.
모든 전선의 소식이 한 사람의 방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1534~1582)오와리(현 아이치현) 출신 중소 다이묘 집안 후손. 소년 시절 “오와리의 바보”라 불릴 만큼 파격적이었으나 1560년 오케하자마 전투에서 대군을 기습 격파하며 이름을 알렸다. 이후 교토 입성·막부 해체·대규모 학살을 거치며 천하 통일에 가장 근접한 인물이 됐다.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義昭, 1537~1597)무로마치 막부 제15대이자 마지막 쇼군. 노부나가의 지원으로 1568년 쇼군에 올랐으나 노부나가의 전횡에 반발해 반노부나가 연합을 조직했다. 1573년 교토에서 추방당하며(죽이지 않고 내쫓음) 260년 무로마치 막부가 사실상 종료됐다.
히에이산 엔랴쿠지(比叡山延暦寺)교토 북동쪽 히에이산의 천태종 총본산. 막대한 영지와 무장 승려(승병)를 거느린 실질적 군사·정치 세력이었다. 노부나가는 1571년 반노부나가 세력을 지원한다는 이유로 산을 포위하고 불태워 수천 명을 학살했다.
이시야마 혼간지(石山本願寺)현재 오사카 성 자리에 있던 정토진종 계통의 사찰 요새. 강력한 무장 신도 조직(잇코잇키)을 바탕으로 노부나가와 10년 이상 대립했다. 1580년 천황의 중재로 화의하고 퇴거하며 전쟁이 끝났다.
다케다 가문(武田氏)가이(현 야마나시현)의 유력 다이묘 가문. 다케다 신겐이 이끌던 시절 일본 최강 기마대로 명성을 떨쳤다. 신겐 사후 아들 가쓰요리가 뒤를 이었으나 1575년 나가시노 전투에서 노부나가의 조총 전술에 기마대가 궤멸됐고, 1582년 3월 멸망했다.
모리 가문(毛利氏)주고쿠 지방(현 히로시마·야마구치 일대) 최대 다이묘 가문. 1582년 당시 당주 데루모토 휘하에 광대한 영지를 보유했으며 하시바 히데요시와 빗추 다카마쓰성을 둘러싸고 교전 중이었다.
우에스기 가문(上杉氏)에치고(현 니가타현) 지방의 유력 다이묘 가문. 우에스기 겐신이 이끌던 시절 다케다 신겐과 함께 전국시대 최강의 무장으로 꼽혔다. 겐신 사후 당주 가게카쓰 체제에서 노부나가의 공세에 밀리고 있었으나 혼노지의 변으로 위기를 모면했다.

처음으로 이름을 알린 1560년 오케하자마 전투부터 다케다 가문이 멸망하는 1582년까지 — 노부나가는 여기까지 오는 22년 동안 동시대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결정적인 장면들을 만들어왔다.

연도 결정적 장면
1560 오케하자마 — 이마가와 요시모토 격파, 무명에서 이름을 얻다
1568 교토 입성,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쇼군에 옹립
1571 히에이산 엔랴쿠지 학살·방화
1573 무로마치 막부 종결 — 요시아키 추방
1575 나가시노 — 다케다 기마대 궤멸
1580 이시야마 혼간지 화의 — 10년 전쟁이 끝나다
1582 3월 다케다 가문 멸망, 천하 통일 코앞
노부나가가 지나온 스물두 해
전국시대의 주요 전투와 정복을 세 장면으로 구성한 일본 병풍풍 삽화. 기마 무사, 성곽, 행군하는 군대가 한 화면에 이어진다.
승리 하나가 다음 승리의 발판이 되며, 천하 통일의 길이 만들어졌다.

그런데 천하통일을 눈 앞에 둔 1582년 초여름의 공기는 묘하게 느슨했다. 하시바 히데요시는 서쪽 빗추 다카마쓰에서 모리와 싸우고 있었고,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승자 편 손님처럼 교토와 사카이를 드나들고 있었다. 노부나가는 사방에 군대를 뻗쳐놓고 정작 본인은 전장에서 한발짝 떨어져 있었다.

사카이(堺)현 오사카부 남부 지역. 15~16세기 일본 최대 자유 무역 도시로 포르투갈·명나라 등과의 교역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조총과 화약의 생산·유통 거점이기도 해 노부나가는 이 도시를 일찍부터 장악했다.
하시바 히데요시(羽柴秀吉)훗날의 도요토미 히데요시. 최하위 무사(아시가루) 출신으로 노부나가 휘하에서 급속히 출세했다. 탁월한 전략과 외교 수완으로 노부나가의 최측근 장수가 되었으며 1582년 당시 모리 가문 공략을 맡아 빗추 다카마쓰성을 포위 중이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 1543~1616)미카와(현 아이치현 동부) 지방의 다이묘. 1560년대부터 노부나가와 동맹을 맺어 사실상 노부나가 진영에 종속된 형태로 함께 싸웠다. 혼노지의 변 당시 노부나가의 초청으로 교토·사카이를 방문 중이었다.

그 무렵 비와 호수(琵琶湖, 교토 동쪽의 거대한 담수호) 북쪽의 산 위에는 검은 탑 하나가 저녁빛을 먹고 서 있었다. 아즈치 성이었다. 그곳의 주인이 오다 노부나가였다. 1582년 기준으로 마흔여덟 살. 전국시대 첫번째 천하인(天下人)이었다.

비와호 너머의 아즈치 성
황혼의 비와호 너머로 산꼭대기에 선 아즈치 성이 보인다. 잔잔한 호수와 어두운 산자락 위로 성의 천수각이 솟아 있다.
호수 너머 산 위의 성은, 이미 천하의 중심처럼 보였다.

천황의 방, 그 위의 방

1582년 저녁의 아즈치 성
1582년 저녁의 아즈치 성 천수각 외관. 비와 호수 북쪽의 산꼭대기, 검은 옻칠 벽에 금박 장식. 일곱 층의 거대한 탑이 황혼 하늘 배경으로 솟아 있다.
천황 위에 노부나가가 있었다

아즈치 성에 올라가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을 것은 크기였을 것이다. 돌벽은 높고, 천수각은 지나치게 크고, 금박 장식은 해 질 녘에도 번들거렸을 것이다. 정말 기묘한 것은 장식이 아니라 배치였다. 성에는 천황이 머무를 ‘어행의 방’이 있었다. 보통이라면 그 방이 가장 높은 자리여야 했다. 그런데 노부나가는 그보다 더 높은 곳에 자기 거처를 놓았다. 천황을 모셔놓고, 그 위에 자기가 앉는 구조였다.

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스는 이 성을 보고 경탄을 기록했다.

성의 구조는 매우 거대하고 정교하였으며, 그 화려함과 정교함은 유럽의 왕궁과 비교해도 결코 뒤떨어지지 않았고, 오히려 여러 점에서 우월하였다.

루이스 프로이스(Luís Fróis, 1532~1597)포르투갈 출신 예수회 선교사. 1563년 일본에 도착해 약 30년간 활동했으며 노부나가와 직접 면담한 기록을 남겼다. 그의 저서 『일본사(Historia de Japam)』는 16세기 일본을 기록한 귀중한 1차 사료다.

프로이스는 화려함을 칭찬했지만, 아즈치 성의 진짜 오만은 금박이 아니라 배치에 있었다. 일본의 질서에서 천황은 위에 있고, 쇼군과 다이묘는 그 아래에 있어야 했다. 그런데 이 성에서는 그 순서가 뒤집혀 있었다. 노부나가는 말로 선언하지 않고 건물로 선언했다. “나는 천황보다 위에 있는 사람“이라고.

천황의 방, 그 위의 방
아즈치 성을 옆에서 잘라 본 단면도 형식의 삽화. 아래층에는 천황이 앉아 있고, 그 위층에는 노부나가가 홀로 앉아 있다.
건물의 단면 안에서 천황은 아래에, 노부나가는 그 위에 놓였다.

스스로 신이 된 사람

성 안에는 소켄지(摠見寺)라는 절이 있었다. 그 절에 들어가 절을 하면 부처가 아니라 노부나가가 절을 받았다. 그는 자기 몸을 신체(神體)로 모시게 했고, 다이묘와 가신들에게 그 앞에 엎드리게 했다.

그를 참배하는데 100문이 필요했다. 노부나가는 살아 있는 동안 스스로를 신으로 만들었을 뿐 아니라, 그 신앙의 입장료도 받았다. 시주도 아니고 헌금도 아니었다. 권력이 자기 자신을 숭배하는 데 요금을 매긴 셈이었다.

프로이스는 이 광경을 기록했다.

노부나가는 자기가 세상의 유일한 주인이자, 그리고 신이라고 믿었고,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그를 신으로 섬기도록 하였다.

이쯤 되면 노부나가는 천황을 흉내내서 쫓아가려는 것도 아니고, 부처님의 권능으로 자신을 치켜세운 것도 아니다. 천황과 부처보다 높은 존재가 되고 싶어했다.

소켄지 절 본당
아즈치 성곽 내 소켄지 사찰 내부. 부처상 대신 단순한 돌 하나가 제단 위에 놓여 있다. 향 연기. 불교 사찰의 겉모습이지만 경배의 대상이 인간인 사찰.
불상이 빠진 자리에 인간이 앉은 절.

나는 제육천마왕이올시다

9년전으로 시간을 돌려보자. 1573년, 노부나가는 다케다 신겐에게 보내는 편지의 서명란에 자기 이름 대신 다른 이름을 적었다. “제육천마왕.” 직접 써넣은 자기 규정이었다.

제육천마왕이라는 이름
어두운 공간에서 뒷모습의 오다 노부나가가 서 있고, 그 앞에 검은 불길과 마왕을 암시하는 거대한 실루엣이 드리워진 상징적 삽화.
노부나가는 한 글자씩, 자기 자신을 마왕의 자리에 올려놓았다.

제육천마왕은 불교 우주론에서 욕계 육천의 맨 위, 타화자재천을 다스리는 존재였다. 그런데 동시에 마라(魔羅), 곧 수행을 흐트러뜨리고 인간을 욕망에 붙잡아두는 적이기도 했다. 남의 기쁨을 빼앗아 자기 것으로 삼는 자. 욕계의 정점에 앉아 있으되 빛이 아니라 어둠 쪽에 선 왕.

욕계 육천(欲界六天)과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불교 우주론에서 인간과 천신이 거주하는 욕계에는 여섯 층의 세계가 있다. 그 맨 꼭대기가 타화자재천으로, 남의 즐거움을 빼앗아 자기 것으로 삼는 존재가 다스린다. 이 하늘의 주인인 마라(魔羅)는 수행을 방해하고 인간을 욕망에 가두는 악마로, 《숫타니파타》〈정진의 경〉(SN3.2)에서 부처님에게 깨달음의 길은 어려우니 살아서 공덕이나 쌓으라며 회유하는 존재로 등장한다. 여섯 번째 하늘에 사는 마왕이니 한자로 표현하면 제육천마왕(第六天魔王)이 된다.

실제로 마왕이라는 말은 허세가 아니라 자백에 가까웠다. 그 이름을 쓰기 2년전인 1571년, 그는 히에이산 엔랴쿠지를 불태웠고 수많은 승려와 난민을 죽였다. 1574년에는 나가시마 일향종 세력을 포위해 다시 불로 끝장을 냈다. 종교가 무장 세력이기도 했던 시대였지만, 그래도 그가 택한 방식은 유난히 잔인하고 철저했다. 그는 사찰을 굴복시키는 데서 멈추지 않고 사찰이 기대고 있던 권위 자체를 태워버렸다. 그러고 나서 자기 이름 옆에 제육천마왕을 적었다. 멋을 부린 서명이 아니라, 자기가 무슨 존재가 되어가고 있는지 알고 있다는 서명이었다.

불타는 엔랴쿠지
산비탈의 여러 사찰 건물이 불타고 연기가 치솟는 모습. 전경에는 버려진 깃발과 창이 놓여 있고, 사람들은 불길을 피해 달아난다.
산 위의 사찰이 불길에 휩싸이고, 그 아래로 사람들은 흩어졌다.
나가시마 잇코잇키(長島一向一揆)이세(현 미에현) 나가시마 지역을 거점으로 한 정토진종 신도들의 무장 봉기 세력. 1570년부터 세 차례 노부나가와 충돌했다. 1574년 노부나가는 화의를 빌미로 퇴각하는 적을 사살하고 잔류자를 불태워 진압했다. 전쟁사에서도 유례없는 잔혹한 방식으로 유명하다.
노부나가, 스스로 마왕을 칭하다
오다 노부나가의 반신 초상. 촌마게에 어두운 예복. 그의 뒤로 제육천마왕(마라)이 실체로 서 있다 — 푸른빛 도는 검은 피부, 4개의 팔에 곡도·올가미·금강저·시든 연꽃, 송곳니 드러난 입, 이마의 제3의 눈, 황금 보석 왕관, 검붉은 천의와 검은 갑옷, 등 뒤의 검은 화염 광배. 두 얼굴에 각각 촛불.
그가 자칭한 것은 비유가 아니었다.

마왕이 가신을 부수는 법

자기 자신을 부처 위에 모신 사람은, 자기 옆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마음껏 칼을 휘둘렀다. (심판할 존재가 없었으니까) 노부나가가 적과 싸운 방식은 익히 알려져 있지만, 그가 부하와 천황을 다루는 방식 역시 그 못지않게 잔혹했다. 천하제패가 가까워 올수록 칼끝은 점점 안쪽으로 향했다.

마쓰나가 히사히데(松永久秀)는 다섯 번이나 주군을 갈아탄 노련한 다이묘였다. 1577년, 그가 또 한 번 배반의 깃발을 들었을 때 노부나가는 군대를 보내 그를 시기산 성에 가뒀다. 항복의 조건으로 노부나가는 그가 평생 소장해온 명물 차솥 히라구모(平蜘蛛釜)를 넘기라고 요구했다고 전한다. 마쓰나가는 거부했다. 전승에 따르면 그는 이 솥을 산산이 깨뜨린 뒤 성에 불을 지르고 그 안에서 죽었다. 항복하는 대신, 자신이 가진 명물과 최후의 선택을 모두 가루로 만든 셈이었다.

시기산 성의 마지막 밤
비 내리는 밤, 시기산 성의 건물들이 불타고 있다. 성문 앞에는 무장한 병사들이 보이며 전경에는 홀로 선 마쓰나가 히사히데가 있다.
히사히데는 항복 대신 성과 명물을 함께 불 속에 남겼다.
마쓰나가 히사히데(松永久秀, 1508~1577)야마토(현 나라현)를 거점으로 한 책략가형 다이묘. 1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테루 살해의 배후로 알려졌고, “일본사 최초의 폭탄 자살자”라는 별칭이 따라다닌다. 다도와 명물 다기 수집의 대가이기도 했다.
히라구모(平蜘蛛釜)마쓰나가 히사히데가 평생 소장했던 명물 차솥(茶釜). 낮고 넓적하게 뻗은 몸체가 거미가 웅크린 모습을 닮았다 해서 ‘납작 거미’라는 이름이 붙었다. 노부나가가 시기산 성 함락 직전 항복의 조건으로 이 솥을 요구했다고 전하며, 마쓰나가는 끝내 내주지 않고 성과 함께 사라졌다.

이 히라구모 솥은 쓰쿠모 나스와 다른 물건이다. 쓰쿠모 나스는 1568년 이미 노부나가에게 헌상된 뒤였다. 혼노지의 불길에서 한 번 타고 잿더미에서 회수된 쓰쿠모 나스는 훗날 오사카성의 불길 속에서 다시 산산이 부서졌고, 이에야스가 잿더미에서 파내 옻으로 접합해 복원했다고 전한다. 지금은 세이카도 문고 미술관에 남아 있다. 한 물건이 세 사람의 권력과 두 번의 몰락을 통과한 셈이다.

3년 뒤 1580년 8월, 30년 가까이 봉직해온 최고참 가신 사쿠마 노부모리가 별안간 추방당했다. 명목은 이시야마 혼간지 공략의 부진. 노부나가는 직접 붓을 들어 19개 조항의 추방장을 적어 보냈다 — 무능, 게으름, 사익 추구, 부하 관리 실패. 30년의 공이 19줄의 비난으로 정리되었다. 사쿠마는 고야산으로 출가했고, 그곳에서 곧 죽었다.

19개조의 추방
넓은 성의 접견실에서 한 노장 무사가 짐을 들고 떠나고, 멀리 단상 위의 권력자와 가신들이 그를 바라보는 장면.
30년의 봉직은 한 장의 문서 앞에서 끝났다.

이 사건이 가신단을 얼어붙게 한 이유는 단순했다. 사쿠마가 무슨 죄를 지어 잘렸는가가 아니었다. 노부나가가 마음먹으면 30년의 공도 한 장의 종이로 끝낼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옆자리에 앉은 사람이 자기 차례를 셈하기 시작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사쿠마 노부모리(佐久間信盛, ?~1582)오다 가문 최고참 가신 중 한 명으로 노부나가의 부친 노부히데 시절부터 봉직했다. 1576년부터 이시야마 혼간지 공략 총사령관을 맡았으나 5년간 결정타를 내지 못했다는 이유로 1580년 추방당했다. 19개조 추방장은 노부나가의 가신 통치를 상징하는 유명한 문서로 남아 있다.

천황도 마왕 아래다

가신만이 칼끝의 대상이 아니었다. 1581년 무렵부터 노부나가는 오기마치 천황(正親町天皇)에게 양위를 종용하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천황을 다음 사람으로 갈아치우는 일을 다이묘가 직접 압박한 것이다. 일본 질서의 정점에 누구를 앉힐지를, 그 정점 아래에 있는 자가 결정하려 들었다.

양위를 종용받는 천황
해 질 녘 교토 황궁의 문과 담장. 궁정의 건물 앞에 긴장한 사자와 무사들이 서 있고, 멀리 어두운 하늘이 보인다.
성문 밖의 압박은, 궁정 안의 질서까지 흔들고 있었다.

아즈치 성 배치에서 시작된 “천황을 발 아래 두는 구조”가, 이번엔 사람을 직접 옮기는 단계로 넘어가고 있었다. 자기를 신으로 모시게 했고, 마왕이라는 이름으로 자기를 규정했고, 30년 가신을 종이 한 장으로 추방했고, 이제 천황까지 자기 손으로 옮기려 했다. 위로도 옆으로도 안전한 자리는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오기마치 천황(正親町天皇, 재위 1557~1586)무로마치 막부 말기부터 도요토미 시대 초입까지 재위한 천황. 노부나가의 후원으로 즉위 의례를 정상적으로 거행할 수 있었지만, 말년에는 노부나가의 양위 압박 속에서 줄타기를 해야 했다. 혼노지의 변으로 그 압박에서 벗어났다.

사료 노트

  • 마쓰나가 자폭 일화: 1577년 시기산 성 함락 때 마쓰나가 히사히데가 명물 히라구모 솥을 깨뜨리고 성에 불을 질러 죽었다는 이야기는 『신장공기』와 후대 군기물에 걸쳐 전해진다. 다만 솥을 끌어안고 화약과 함께 폭사했다는 세부는 후대의 극적 각색이 강하며, 사료마다 묘사가 다르다.
  • 쓰쿠모 나스의 두 번의 화재: 쓰쿠모 나스는 1568년 노부나가에게 헌상된 뒤 1582년 혼노지에서 불타고, 1615년 오사카성 함락 때 다시 불탄 것으로 전해진다. 이후 이에야스의 명령으로 옻칠 접합 복원되었으며 현재 세이카도 문고 미술관이 소장한다. 마쓰나가의 히라구모 솥과는 다른 물건이다.
  • 사쿠마 추방장: 1580년 8월 노부나가가 사쿠마 노부모리에게 보낸 19개조 추방장은 1차 사료에 비교적 잘 남아 있는 편으로, 본문은 『신장공기』 등에서 확인 가능하다. 가신 통치의 대표 문서로 평가된다.
  • 천황 양위 압박: 1581~82년 노부나가가 오기마치 천황에게 양위를 종용했다는 이야기는 동시대 일기·문헌에 단편적으로 등장하나, 양위 요구의 강도와 시점에 대해서는 학자들마다 해석이 갈린다.
출처

이미지 출처

생성형 이미지: 본문에 사용한 생성형 이미지는 Midjourney로 제작했다.

본문 출처

太田牛一 『信長公記(신장공기)』 — 노부나가의 행적을 기록한 핵심 1차 사료. 사쿠마 추방장 원문, 가신 처우, 아즈치 성 관련 기록 참조.

ルイス・フロイス 『日本史(Historia de Japam)』 — 포르투갈 예수회 선교사가 직접 목격·기록한 동시대 자료. 아즈치 성 묘사와 소켄지 참배 장면 인용 출처.

谷口克広 『信長と消えた家臣たち — 失脚・粛清・謀反』 洋泉社, 2009 — 가신단 추방·숙청 사례를 사료 기반으로 재구성한 연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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