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중세사
혼노지의 변 · 3편

어쩔 수 없구나
— 혼노지의 변

(3) 시니 오요바즈

어쩔 수 없구나 — 혼노지의 변 (3) 시니 오요바즈

빗소리와 다실

1582년 6월 1일 저녁, 교토 나카교(中京)의 작은 절 혼노지(本能寺)에서 다회가 열렸다. 주최자는 오다 노부나가였다. 그가 이 자리를 위해 미리 옮겨 놓은 명물 다기는 38점이었다고 전한다. 검은 라쿠 차완, 청자 다관, 무로마치 시대 향로, 그리고 훗날 잿더미 속에서 수습되는 극소수 명물 가운데 하나로 전해지는 가타쓰키 다관 세코(勢高肩衝)까지 — 자기 평생의 컬렉션 중 핵심을 한 자리에 펼쳐 놓은 셈이었다.

38점이 모인 밤
등불이 켜진 일본식 다실에서 노부나가와 손님들이 다회에 앉아 있고, 앞에 명물 다기가 놓여 있다.
다기는 노부나가의 손 안에 모였고, 그 밤은 마지막이 됐다.
일본 다기 문화와 명물(名物)16세기 일본의 다도는 무로마치 후기의 무라타 주코(村田珠光)에서 시작해 다케노 조오(武野紹鷗)를 거쳐 센노 리큐(千利休)에 이르러 정착된, 한 잔의 차를 매개로 한 정치·문화 장치였다. 그 중심에 놓인 것이 명물(名物) — 유래와 소장 이력이 또렷이 적힌 다관·차완·향로 등이다. 다이묘들은 명물 한 점을 영지 한 채와 같은 무게로 놓고 거래했고, 노부나가는 가신에게 영지 대신 명물을 내리는 방식으로도 자기만의 보상 체계를 운영했다.
세코 가타쓰키(勢高肩衝)무로마치 시대부터 전해진 명물 가타쓰키(肩衝) 다관. 혼노지의 변 당시 아즈치에서 옮겨온 38점 중 하나로 전해지며, 이튿날 화재 이후 잿더미 속에서 수습된 극소수 명물 가운데 하나로 알려져 있다.
하쓰하나(初花)는 그 자리에 없었다노부나가가 가장 아꼈다고 전하는 가타쓰키(肩衝) 다관 하쓰하나는 흔히 혼노지의 화재로 사라진 것으로 오인되지만, 이 시점에는 이미 장남 노부타다에게 전해져 니조고쇼에 있었다. 혼노지 다기 38점 목록에도 하쓰하나는 들어 있지 않다. 이후 여러 소유자를 거쳐 현재는 도쿠가와기념재단이 소장한 중요문화재로 남아 있다.

손님은 측근 무사 30~40명, 그리고 공경(公卿) 몇 명이었다. 공경은 조정 측 인사로, 노부나가가 천황 양위 압박 같은 사안을 두고 줄다리기를 하던 상대였다. 그들에게 자기 권세를 보여주는 자리였고, 동시에 스스로에겐 38점을 한 자리에 다 꺼내놓을 만큼 안전하다고 믿는 표시이기도 했다.

혼노지는 전략적으로 이상한 자리였다. 도성 한복판의 법화종 사찰로, 성벽도 망루도 없는 목조 건물이었다. 노부나가는 갑옷도 칼도 가까이 두지 않았다. 자기 동맹이 사방에 있고, 적이라면 모리뿐인데 그 모리는 빗추 다카마쓰에서 히데요시에게 묶여 있었다. 그날 저녁 그가 안전을 의심할 이유는 없었다. 호위 인원은 100명을 넘지 않았다. 6월의 장맛비가 기와에 떨어지는 소리가 다실의 정적과 섞이고 있었다.


혼노지의 마지막 다회
16세기 일본 사찰 내부의 호화로운 다회. 다다미 위 옻칠 단상에 명물 다기들이 진열되어 있고, 둘러앉은 무사와 공경들 가운데 노부나가가 자리잡고 있다. 등불 빛이 따뜻한 호박색으로 공간을 비추고 가장자리는 어둠으로 가라앉는다.
그날 밤 그 방에 펼쳐진 38점은 평생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한 자리에 모인 컬렉션이었다.
혼노지(本能寺)교토 나카교에 있던 법화종 사찰. 노부나가가 교토 체류 시 자주 묵던 곳이다. 법화종이 사카이 상인들과 화약·조총 네트워크로 묶여 있어, 그에게는 종교적 공간이라기보다 군수·무역의 거점에 가까웠다. 1582년 6월 2일의 사건 이후 절은 다른 자리로 옮겨졌고, 원래 자리에는 작은 비석만 남아 있다.

가메야마의 출정

같은 시각, 단바국 동쪽 끝의 가메야마 성(亀山城)에서는 미쓰히데가 1만 3천의 군대를 움직이고 있었다. 출정 명분은 사흘 전 노부나가에게 받은 명령 — 빗추 다카마쓰의 히데요시 군에 합류해 모리를 친다는 것. 군사들에게 알린 행선지도 그대로 서쪽이었다.

가메야마에서 출정하다
단바국 가메야마 성 앞에서 출정 채비를 마친 1만 3천의 군대. 저녁 노을 아래 정렬된 도라지 문장의 군기와 검은 갑옷의 행렬, 말 위의 미쓰히데가 뒤에 솟은 성을 등지고 동쪽 능선을 바라본다. 대열 대부분은 서쪽으로 간다고 믿고 있다.
출정의 명분은 모리 정벌이었다. 후대의 전승에 따르면, 진짜 목적을 아는 사람은 다섯 중신뿐이었다.
아케치군의 행군
장맛비 속 산악 협곡을 따라 횃불과 깃발이 이어지는 아케치 군대의 긴 행렬을 위에서 내려다본 장면.
산을 가득 메운 행렬은 아직 자신들이 어디로 향하는지 몰랐다.

미쓰히데가 출발 전 다섯 중신에게만 진짜 목적을 알렸다는 이야기는 후대의 기록과 연구에서 반복된다. 이름은 사이토 도시미쓰(斎藤利三), 아케치 미쓰하루(明智光春), 아케치 미쓰타다(明智光忠), 후지타 교안(藤田行政), 미조오 시게토모(溝尾茂朝)로 정리된다. 다만 동시대 기록이 회의 장면과 참석자 전원을 직접 확인해 주는 것은 아니므로, 본문에서는 ‘다섯 명뿐이었다’는 숫자보다 그 전승이 만들어내는 긴장에 초점을 둔다. 나머지 1만 3천 명의 병사들은 자신들이 모리와 싸우러 서쪽으로 간다고 믿은 채 산을 넘기 시작했다.

행렬이 가메야마 성을 빠져나간 시각은 6월 1일 저녁 6시 무렵으로 추정된다. 같은 시각 혼노지에서는 막 다회가 시작되고 있었다.

사이토 도시미쓰(斎藤利三, 1534~1582)미쓰히데의 가장 신뢰받은 가신이자 군대장. 미노국 출신으로 미쓰히데와 동향이었다. 혼노지의 변에서 선봉을 맡았다고 전한다. 11일 뒤 야마자키 전투에서 패했고, 그로부터 나흘에서 닷새 뒤 처형되었다. 그의 딸 오후쿠가 후일 도쿠가와 3대 쇼군 이에미쓰의 유모 가스가노 쓰보네(春日局)가 된다.

혼노지에서의 다회

혼노지의 다회는 깊은 밤까지 이어졌다. 노부나가가 38점의 다기를 한 점씩 손님 앞에 꺼내 놓고 그 유래를 설명했다는 기록이 있다. 한 점씩 들어 보이며 어떤 다이묘에게서 어떤 사연으로 받아 왔는지를 풀어 놓는 자리였다.

다기는 다도가들 사이에서 단순한 미술품이 아니었다. 한 점의 명물은 다이묘 한 사람의 영지와 맞바꿀 만한 가치가 있었고, 노부나가는 이 점을 일찍부터 활용했다. 가신에게 전공의 보상으로 영지 대신 다기를 내리는 일을 자주 했고, 거꾸로 가신을 잘라낼 때는 다기 한 점만 남기고 영지를 거두는 일도 했다. 1편에서 본 마쓰나가 히사히데가 명물 히라구모 솥을 끝까지 내놓지 않고 깨뜨렸다는 전승도, 다기 한 점이 곧 영지였고 영지가 곧 목숨이었던 그 시대의 풍경 한 자락이었다.

그러니까 그날 밤의 38점은 단순한 컬렉션이 아니라 노부나가가 평생 동안 모은 권력의 물증이기도 했다. 같은 자리에 모아 놓고 펼쳐 본 일은 그날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가 그 38점을 한 자리에 모은 데에는 가까운 시일 안에 무언가를 결정할 의도가 있었을 것이라는 추정이 있다 — 천황 양위, 새로운 위계 선포, 다음 단계의 천하 구상. 그러나 혼노지에 있던 누구도 그날 밤이 컬렉션의 마지막 무대였다는 것을 몰랐다.


혼노지의 다기 38점후대 편찬물에 따르면 아즈치에서 옮겨온 명물은 38점이었다. 그 가운데 쓰쿠모 나스(九十九茄子) 차입과 세코(勢高肩衝) 가타쓰키는 잿더미에서 수습된 두 점으로 전해지며, 마쓰시마(松島)는 잎차 항아리였다. 쓰쿠모 나스는 이후 1615년 오사카성에서도 다시 불탔고, 옻으로 접합해 복원되었다.
평생의 컬렉션
어둑한 다실 안 옻칠 단상과 다다미 위에 늘어선 수십 점의 일본 명물 다기. 검은 라쿠 차완, 청자 다관, 청동 향로, 가타쓰키 차이레, 차센과 차샤쿠, 무쇠 다관, 알코브의 족자와 청동 화병. 등불의 따뜻한 빛이 일부를 비추고 가장자리는 어둠으로 가라앉는다. 인물 없음.
권력의 물증이 같은 자리에 펼쳐진 것은 그날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오이노사카의 갈림길

자정 무렵, 미쓰히데의 군대는 오이노사카(老ノ坂峠)에 닿았다. 단바와 야마시로(山城) 두 지방을 잇는 산 고개로, 산인도(山陰道)에서 가장 중요한 분기점이었다. 서쪽으로 내려가면 빗추로, 동쪽으로 내려가면 교토로 가는 길이었다.

1582년 6월 1일의 동선
1582년 6월 1일 일본 중부 일대 지도. 좌상단에 가메야마 성 출정 장면, 좌하단에 빗추 다카마쓰 성, 우상단에 혼노지 다실 장면. 단바국·야마시로국·빗추국 영역 위에 가메야마 성, 오이노사카, 혼노지, 빗추 다카마쓰 성의 위치가 표시되어 있다.
한 사람은 가메야마에서 동쪽으로 내려갔고, 다른 한 사람은 빗추에서 묶여 있었다. 그 사이의 한 점이 혼노지였다.

미쓰히데는 이곳에서 군대를 일단 정지시키고 동쪽 산기슭의 작은 마을 시노무라(篠村)에 측근 가신들을 모아 마지막 회의를 했다고 전한다. 회의의 정확한 디테일 — 누구를 어디로 보낼지, 교토 진입 경로, 혼노지 포위 진영의 배치 — 은 사료에 남아 있지 않지만, 그 자리에서 공식적으로 결정이 내려졌다는 사실 자체는 여러 사료가 공통으로 전한다. 회의가 끝났을 때 군대는 동쪽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시노무라의 마지막 회의
어두운 방에서 갑옷 입은 아케치 가신들이 작은 화로 주위에 모여 고개를 숙이고 비밀 회의를 한다.
불빛 하나를 가운데 두고, 몇 사람만이 진짜 목적을 들었다.

같은 시각 혼노지에서는 다회가 끝나가고 있었다. 노부나가는 측근들과 마지막 술자리를 끝내고 잠자리에 들 준비를 하고 있었다.

오이노사카(老ノ坂峠)단바국과 야마시로국을 잇는 해발 약 200미터의 고개. 옛 산인도(山陰道)의 핵심 분기점으로 교토 서쪽 입구에 해당한다. 1582년 6월 1일 자정 무렵 미쓰히데 군대가 이 고개에 도달했고, 그곳의 결정이 일본사를 갈라놓았다.
오이노사카의 갈림길
깊은 밤의 일본 산 고개. 두 갈래 길이 갈라진 분기점. 비 그친 후 젖은 돌, 멀리 능선의 윤곽, 분기점에 낡은 석표. 인적 없음.
서쪽으로 가면 모리, 동쪽으로 가면 주군이었다.

적은 혼노지에 있다

오이노사카에서 동쪽으로 내려간 군대는 새벽 직전 가쓰라가와(桂川) 강 앞에 닿았다. 교토 서쪽 외곽을 흐르는 강으로, 이 강만 건너면 도성이었다. 강가에서 미쓰히데가 군사들에게 진짜 행선지를 처음으로 알렸다고 전한다.

적은 혼노지에 있다(敵は本能寺にあり)

가쓰라가와의 외침
새벽 직전 안개가 깔린 가쓰라가와 강가. 말 위의 미쓰히데가 칼을 들어 외치고, 그 뒤로 검은 갑옷의 1만 3천 군사가 도라지 문장의 깃발을 든 채 도열해 있다. 강 건너편으로 흐릿하게 교토의 지붕선이 비친다. 병사들의 얼굴에는 놀람과 침묵이 번진다.
강을 건너기 전까지 그들은 자기들이 어디로 가는지 몰랐다. 그리고 그 순간, 누구를 죽이러 왔는지 알게 됐다.

도하 전까지 1만 3천 병사들은 자기들의 행선지를 모르고 있었다. 그제서야 그들은 자기들이 누구를 죽이러 왔는지 알게 되었다. 누구도 도망치지 않았고, 누구도 배신하지 않았다. 군은 그대로 새벽 4시 무렵 혼노지 앞에 닿았다.

가쓰라가와(桂川)교토 서쪽을 남북으로 흐르는 강. 도성과 교토 외곽을 가르는 자연 경계. 1만 3천 군대의 도하 자체가 큰 일이었으나, 6월 새벽의 이른 시간이라 소문이 도성 안으로 전해지지 않았다. 노부나가가 깨어났을 때 절은 이미 포위되어 있었다.

어쩔 수 없구나

새벽 4시경, 혼노지 밖에서 큰 함성과 총소리가 들려왔다. 잠들어 있던 노부나가가 일어나 측근에게 “모반인가”라고 물었다. 답한 사람은 시동 모리 란마루(森蘭丸)였다고 전한다. 만 17세도 채 되지 않은 젊은 시동은 절 밖을 잠깐 살핀 뒤 들어와 이렇게 답했다.

아케치 군과 같습니다(明智の者と見え申し候)


어쩔 수 없구나(是非に及ばず)

본당 안의 마지막 대화
화면 왼쪽에는 혼노지를 향해 화승총을 쏘는 병사들이 보이고, 오른쪽 방 안에는 노부나가와 어린 시동이 등불 아래 앉아 있다.
바깥에서는 조총이 울렸고, 안에서는 마지막 명령이 오갔다.

시니 오요바즈(是非に及ばず)는 두 갈래로 풀이된다. 한 쪽은 “옳고 그름을 따질 일이 아니다”라는 체념. 다른 한 쪽은 “더 이상 시비할 시간이 없다, 싸우자”는 전투 명령. 두 풀이 모두 그 자리에 어울린다. 어느 쪽이든 그날 새벽 노부나가 일이 어떻게 흘러갈지 예상했을 것이다. 평생 가신을 어떻게 다뤘는지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본인이었고, 가신단의 누군가가 자기를 친다면 그 결말이 어떤 모양일지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얼굴 없는 포위
혼노지 마루에서 바라본 아케치 군의 포위. 비 내리는 마당에 얼굴이 드러나지 않는 병사들과 화승총의 섬광이 번지고, 노부나가의 시점에서 사찰의 처마와 기둥이 화면을 감싼다.
노부나가는 그를 보지 못했다. 얼굴 없는 병사들의 포위만 보았다.
모리 란마루(森蘭丸, 1565~1582)노부나가의 측근 시동(小姓). 어린 나이부터 그의 곁을 지켰고, 이 새벽에도 옆에 있었다. 노부나가의 마지막 명령을 받아 본당에 불을 지르고 자결했다고 전해진다. 만 17세였다.
“시니 오요바즈”(是非に及ばず)의 두 해석신장공기에 기록된 노부나가의 마지막 말 중 가장 유명한 한 줄. 직역하면 “옳고 그름을 따질 일이 아니다.” 한쪽 해석은 운명에 대한 체념(이미 끝난 일이다), 다른 쪽은 전투 개시의 명령(시비할 때가 아니다, 싸우자). 두 해석 모두 1차 사료의 같은 문구에서 출발한다.

노부나가, 타 죽다

노부나가는 활을 들고 마루로 나섰다. 화살 몇 발을 쏘았다. 활시위가 끊어졌다. 다시 창으로 바꿔 들었다. 창대가 부러지거나 팔꿈치에 부상을 입었다는 기록이 신장공기에 남아 있다. 호위 100명이 채 되지 않는 상황에서 1만 3천의 군대를 상대로 어떤 종류의 응전도 결과가 보이는 것이었지만, 그는 마지막까지 무기를 들었다.

마지막 응전
16세기 일본 사찰의 마루에 선 노부나가. 갑옷 없이 흰 코소데와 검은 하카마, 머리 흐트러진 채 부러진 창을 두 손으로 쥐고 있다. 왼팔 팔꿈치에서 피가 새어 나오고, 분노한 표정. 마당에는 아케치 군 병사들의 실루엣과 화승총의 섬광. 새벽 직전의 검푸른 하늘에 첫 화염이 비치기 시작한다.
활시위가 끊어진 자리에서, 그는 부러진 창을 다시 들었다.

같은 시각 혼노지 바깥쪽에서는 미쓰히데가 군 배치를 확인하고 있었다. 절 정문과 후문, 부속 건물 입구가 모두 봉쇄됐고 조총은 이미 안쪽을 향해 불을 뿜고 있었다. 그러나 노부나가는 그곳에서 미쓰히데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미쓰히데가 직접 돌격 명령을 외쳤다는 기록도 없다. 평생을 곁에서 모신 2인자는 절 밖에 있었고, 노부나가가 본 것은 얼굴 없는 병사들의 실루엣과 화승총의 섬광뿐이었다.

새벽의 혼노지 포위
장맛비가 내리는 새벽, 혼노지 정문 앞에 아케치 군 병사들이 배치되어 있고 사찰 안쪽에서는 불길과 연기가 치솟는다.
비 속의 절은 이미 사방에서 막혀 있었다.

부상을 입은 노부나가는 안으로 들어갔다. 본당 깊숙한 자리에서 모리 란마루에게 절에 불을 지르라고 명령했다. 자기 시신이 적의 손에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고 전한다. 란마루가 본당 한쪽에 불을 댔고, 노부나가는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기록은 바로 그 문 앞에서 멈춘다. 그 뒤를 본 사람은 없고, 시신도 발견되지 않았다. 후대 기록은 그가 안에서 할복했다고 전하지만, 역사에 남은 확실한 장면은 한 사람이 문을 닫고 사라졌다는 사실까지다.

닫히는 문
불길과 연기 속에서 닫히는 어두운 목재 문. 문틈 사이로 마지막 주황빛이 새어 나오고, 안쪽의 인물은 보이지 않는다.
기록은 이 문 앞에서 멈춘다.

시신은 발견되지 않았다. 미쓰히데 군대는 절을 함락한 후 노부나가의 시신을 찾으려 했지만 끝내 찾지 못했다. 화염이 그날의 절을 통째로 가루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 본당, 부속 건물, 그리고 어제 저녁 다회에 펼쳐 놓았던 38점의 다기까지. 시신 부재는 후일 노부나가 생존설·도주설을 낳지만, 사료의 압도적 다수는 그가 그 안에서 죽었다고 본다.

불타는 혼노지
16세기 일본 사찰 내부가 불에 휩싸이는 순간. 검은 나무 기둥과 다다미에 불이 옮겨붙고, 바닥에 깨진 다기 조각, 절반 탄 차완, 그을린 차시, 타들어가는 족자. 인물 없음.
그날 새벽, 사람과 다기와 권력이 같은 불 안에 있었다.

새벽 6시 무렵, 혼노지의 화염이 교토의 새벽 하늘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일본 천하 통일을 한 발자국 앞에 두었던 마흔여덟 살의 사내가, 자기가 평생 모은 다기 38점과 함께 그 안에서 끝났다.

교토를 붉힌 혼노지의 불
높은 곳에서 내려다본 옛 교토의 지붕들 너머로 거대한 불기둥과 검은 연기가 솟아오른다. 전경에는 사찰 지붕과 등불이 보인다.
한 절의 화염은 도성 전체가 바라보는 신호가 되었다.
노부나가의 시신 부재와 후대의 음모설시신이 끝내 발견되지 않은 사실은 후일 다양한 음모설을 낳았다. 도주설, 시신 은닉설, 미쓰히데와의 사전 모의설, 예수회 배후설 등. 그러나 동시대 1차 사료(신장공기 등)와 다수의 지리 기록은 그가 본당 안에서 자결하고 화재로 시신이 사라졌다는 단순한 결론 쪽을 가리킨다.

사료 노트

  • 혼노지의 시간선: 미쓰히데 군대의 6월 1일 저녁 가메야마 출발, 자정 무렵 오이노사카 도달, 새벽 가쓰라가와 도하, 새벽 4시경 혼노지 도착의 시간선은 신장공기 및 후대 군기물에서 비교적 일관되게 기록되어 있다. 다만 정확한 시각과 군 분산·합류의 디테일은 사료마다 일부 차이가 있다.
  • “적은 혼노지에 있다”의 발화: 본문에서는 정설인 가쓰라가와 도하 시점을 채택했다. 시노무라 회의 직후라는 변형 기록도 후대 군기물에 남아 있다. 동시대 1차 사료에 정확히 같은 문구는 명시되어 있지 않고, 후대 군기물·태합기류에서 정착된 표현이다.
  • “시니 오요바즈”의 발화: 신장공기에 기록된 노부나가의 마지막 말. 신장공기 자체는 노부나가 측근 오타 규이치(太田牛一)가 후일 작성한 기록으로, 이 새벽의 정확한 대화를 그가 어떻게 알았는지에 대한 의문은 남는다. 다만 이 문구가 동시대 사료에 그대로 적혀 있다는 점은 다수의 학자가 인정한다.
  • 노부나가의 시신: 발견되지 않은 사실은 1차 사료가 일치한다. 화재로 인해 사라졌다는 해석이 다수설이며, 후대의 음모설·도주설은 사료적 근거가 약하다.
  • 노부나가의 자결 방식: 신장공기는 노부나가가 본당 깊숙이 들어가 문을 닫았다는 사실까지만 적고, 정확한 자결 방식은 명시하지 않는다. 후대 군기물은 할복으로 묘사하지만, 시신이 발견되지 않은 탓에 마지막 순간의 디테일은 검증할 수 없다.
  • 다기 38점: 정확한 점수와 명단은 사료마다 다르며, 38점이라는 숫자도 신장공기의 한 기록에 의존한다. 다만 노부나가가 다회를 위해 다수의 명물을 옮겨 두었고, 그 대부분이 화재로 사라진 사실 자체는 여러 사료가 공통으로 전한다.
출처

이미지 출처

생성형 이미지: 본문에 사용한 생성형 이미지는 Midjourney로 제작했다.

1582년 6월 1일 동선 지도: 가메야마·오이노사카·혼노지·빗추 다카마쓰의 위치는 옛 율령국(令制国) 영역과 산인도(山陰道) 노선을 참고해 일러스트로 재구성했다.

본문 출처

太田牛一 『信長公記(신장공기)』 — 혼노지의 변 당일의 시간선, 노부나가의 마지막 말(“是非に及ばず”), 모리 란마루의 응대, 다기 38점, 미쓰히데 군의 행로 등 본문 핵심 사실의 1차 사료.

藤田達生 『謎とき本能寺の変』 講談社, 2003 — 미쓰히데의 동기·교토 진입 경로·시노무라 회의에 대한 사료 비판적 정리 참조.

谷口克広 『信長と本能寺の変』 吉川弘文館, 2007 — 노부나가의 호위 규모, 절 구조, 시신 부재의 해석 참조.

太閤記·川角太閤記 류 군기물 — “적은 혼노지에 있다(敵は本能寺にあり)” 발화의 정착, 다기 명단 디테일 등 후대 전승의 출처. 본문 내 사료 노트에서 별도 언급.

Series

어쩔 수 없구나 — 혼노지의 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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