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사

왕관을 내려놓은 날 — 300년 제국의 마지막 황제

왕관을 내려놓은 날 — 300년 제국의 마지막 황제

1894년 가을, 크림반도. 거구의 황제 알렉산드르 3세가 피를 토하며 쓰러졌을 때, 방 한구석의 스물여섯 살 청년은 오열했다. 아버지의 죽음보다, 자신에게 떨어질 제국의 왕관이 더 두려웠다.

갑작스럽게 황위에 오른 니콜라이 2세는 스스로의 한계를 명확히 알고 있었다.

나는 황제가 될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다. 제국을 통치하는 법도, 심지어 장관들에게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니콜라이가 일기에 남긴 이 문장은 겸손이 아니라 절망적인 현실 인식이었다. 온화하고 유약한 성품의 그는 중대한 결정을 미루고 갈등을 회피하는 성향이 강했다. 아버지 알렉산드르 3세가 거대한 체구와 강철 같은 의지로 1억 2천만 러시아 제국을 통치했다면, 아들은 그 반대였다. 외교관들은 니콜라이를 “결코 ‘아니오’라고 말하지 못하는 사람”이라 불렀다. 신하가 무언가를 제안하면 고개를 끄덕이다가, 그 신하가 나가면 반대 의견을 가진 다른 신하의 말에 또 고개를 끄덕였다.

300년 로마노프 왕조는 준비되지 않은 조종사의 손에 맡겨졌다.

젊은 니콜라이 2세의 초상
젊은 니콜라이 2세의 초상. 황제복을 입었지만 눈빛에는 불안과 무게감이 서려 있다.

아들의 병

황태자 알렉세이가 혈우병을 앓는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은 태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혈우병은 작은 상처에도 피가 멎지 않는 병이다. 외부의 상처보다 더 위험한 것은 내출혈이었다 — 무릎이나 팔꿈치에 피가 차면 극심한 고통과 함께 관절이 굳어갔다. 당시 의학으로는 손쓸 방법이 없었다.

알렉산드라는 죄책감에 무너졌다. 혈우병이 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혈통을 통해 유럽 황실 곳곳에 퍼진 유전병이었고, 자신이 아들에게 그 병을 물려줬다는 사실을 그녀는 평생 짊어졌다. 황후는 아들이 고통에 몸부림칠 때마다 밤을 새워 곁을 지켰고, 어떤 의사도 포기한 상황에서 기적을 빌었다.

그 절망적인 기도 앞에 나타난 것이 그리고리 라스푸틴이었다.

그리고리 라스푸틴
그리고리 라스푸틴 (1869~1916)시베리아 토볼스크 출신의 무속인이자 자칭 성자. 알렉세이의 혈우병 발작을 반복적으로 진정시키면서 황후 알렉산드라의 절대적 신뢰를 얻었다. 대신들의 임면에 개입할 만큼 황실 권력을 좌우했으나, 유착 관계가 외부에 알려지며 황실 전체의 신뢰가 치명적으로 무너졌다. 1916년 12월, 영향력을 우려한 귀족 친인척들에게 독살·총살당한다.

시베리아 출신의 이 기괴한 무속인이 어떤 방법을 썼는지는 지금도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라스푸틴이 알렉세이 곁에 있으면 아이의 고통이 잦아들었고, 그것으로 충분했다. 황후는 맹목적으로 그를 신뢰했다. 라스푸틴은 황실 내부로 깊이 파고들었고, 그 과정에서 황실의 권위는 조용히 부서져 내렸다. 귀족들은 분노했고, 민중은 수군거렸다. 황후가 시베리아 무당에게 홀렸다는 소문은 제국 전체로 퍼져나갔다.

아들을 살리려는 어머니의 사랑이, 300년 왕조를 무너뜨리는 균열의 시작이 되었다.


패전과 혁명의 불씨

제국의 외벽도 함께 흔들리고 있었다. 1904년 발발한 러일전쟁에서 러시아는 아시아의 신흥국 일본에 참패했다. 유럽 최강을 자처하던 제국이 동양의 작은 섬나라에 무릎을 꿇었다는 충격은 어마어마했다.

패전의 분노는 곧장 황제를 향했다. 1905년 1월, 페테르부르크 노동자 수십만 명이 황제에게 탄원서를 전달하려 궁전으로 행진했다. 군대는 그들을 향해 발포했다. 수백 명이 죽었다. 러시아 역사는 이날을 피의 일요일이라 부른다.

피의 일요일 (1905년 1월 22일)사제 게오르기 가폰이 이끈 페테르부르크 노동자 수만 명이 황제에게 청원서를 전달하러 겨울 궁전으로 평화 행진했다. 군대가 발포하여 수백~수천 명이 죽거나 다쳤다. 차르를 믿었던 민중의 신뢰가 무너지고 1905년 혁명을 촉발한 사건. 니콜라이는 당일 궁전에 없었으나 모든 책임은 황제에게 귀속되었다.

황제는 이 결정을 내리지 않았다. 그날 그는 궁전에 없었다. 하지만 민중에게 황제의 부재는 자신들에 대한 무관심과 같았다. “선한 차르”를 믿었던 민중의 신뢰는 그날 거리의 피 위에서 돌이킬 수 없이 증발했다.

니콜라이는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의회(두마) 설립을 약속했다. 그러나 권력을 나눠 가질 생각은 없었다. 두마가 황제의 뜻에 반하는 결정을 내리면 해산했고, 또 해산했다. 개혁의 약속은 번번이 황제의 불안감 앞에서 무너졌다.

1917년 혁명기 페트로그라드 거리.
1917년 혁명기 페트로그라드 거리. 군중과 군인들이 뒤섞인 혼란스러운 장면. 겨울 하늘, 눈 쌓인 거리.

1914년, 세계가 전쟁에 들어가다

1914년 여름, 유럽이 전쟁에 불을 붙였다. 사라예보의 총성 하나가 오스트리아, 세르비아, 러시아, 독일, 프랑스, 영국을 차례로 끌어들였다. 제1차 세계대전이었다.

러시아는 슬라브 민족의 보호자를 자처하며 참전했다. 초기 몇 년간 전선은 일진일퇴를 거듭했으나, 러시아군의 상황은 갈수록 악화되었다. 무기가 부족했고, 식량이 부족했고, 장교들의 능력이 부족했다. 1914년부터 1917년까지 러시아군의 사상자는 무려 700만 명을 넘어섰다.

1915년, 니콜라이는 결정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직접 최고 총사령관직에 취임한 것이다. 주변의 만류를 뿌리치고 내린 결정이었다. 그 순간부터 전선의 모든 패배는 황제 개인의 패배가 되었다. 수도 페테르부르크에서는 라스푸틴에 홀린 황후가 대신들을 마음대로 임명하고 해임했다. 귀족들은 경악했다. 제국은 두 곳에서 동시에 무너지고 있었다 — 전선과, 황궁 내부에서.


1917년 3월, 혁명

1917년 겨울, 수도 페테르그라드의 온도는 영하 40도까지 떨어졌다. 빵집 앞에는 새벽부터 줄이 늘어섰다. 전쟁으로 징집된 남성들을 대신해 여성들이 공장 노동을 떠맡았고, 그 여성들이 바로 그 줄의 앞에 서 있었다.

3월 8일, 여성 노동자들이 거리로 나섰다. 빵을 달라는 외침이었다. 그것이 며칠 만에 수십만 명의 파업으로 번졌다. 황제를 지지해야 할 수도 경비대가 시위대에 합류했다. 진압할 군대가 없었다.

그 시각 니콜라이는 수도에서 400마일 떨어진 군 총사령부에 머물고 있었다. 수도의 보고는 신하들에 의해 걸러지고 축소되었다. 황제는 사태의 심각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수도로 귀환하려 했으나 혁명 세력이 철로를 끊어버렸다.

그리고 전보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브루실로프, 루스키, 에베르트 — 러시아 최고위 장군들이 하나같이 같은 말을 전해왔다.

사방에 반역과 비겁함, 그리고 배신뿐이다.

황제는 이것을 일기에 남겼다. 자신을 지탱해주리라 믿었던 군대마저 등을 돌렸다. 그가 쥔 권력은 한 줌 모래처럼 흩어졌다.


기차 안에서

3월 15일, 프스코프 역에 정차한 황제 전용 열차의 내부는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국가 의회인 두마의 대표 두 사람이 굳은 표정으로 기차에 올랐다. 황제에게 공식 하야를 요구하기 위해 적대적인 군중을 뚫고 찾아온 자들이었다.

니콜라이는 그들의 말을 조용히 들으며 오랫동안 침묵했다. 창밖의 눈 덮인 대지를 응시하다가, 이내 펜을 들었다.

서류에 서명하는 황제의 손은 조금도 떨리지 않았다고, 당시 현장에 있던 의원들은 회고록에 전한다.

오후 3시에 시작된 면담이 밤 11시에 퇴위 문서 서명으로 마무리되기까지, 걸린 시간은 고작 8시간이었다. 단 한 번의 조용한 붓놀림이 300년 제국의 숨통을 끊어놓았다.

1917년 3월 15일 프스코프 역 황제 전용 열차 객실 안
기차 객실 안, 니콜라이 2세가 혼자 창밖을 바라보고 있다. 테이블 위에 퇴위 문서와 펜. 황혼 빛이 객실을 물들인다.

아버지의 결정

당초 의회가 준비해 온 문서는 니콜라이 본인의 퇴위만을 명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니콜라이는 직접 문구를 수정하여, 차기 황제로서의 알렉세이의 계승권까지 함께 포기해 버린다.

이는 군주가 아닌 아버지로서 내린 선택이었다. 혈우병을 앓는 열세 살 아들이 부모와 강제로 분리되어, 낯선 새 정권의 정치적 도구로 쓰일 것을 두려워했던 것이다. 제위는 황제의 동생 미하일 대공에게 넘어갔으나, 대공 역시 하루 만에 제위를 거절했다. 300년 왕조는 그렇게, 받는 사람 없이 끝이 났다.

제국의 지배권은 미련 없이 내어줄 수 있었다. 병약한 아이를 홀로 사지에 남겨두는 일만큼은 결코 용납할 수 없었다.
니콜라이 2세와 알렉세이
니콜라이 2세와 알렉세이가 함께 있는 평화로운 순간. 아들의 손을 잡거나 어깨에 손을 얹은 아버지의 모습.

봄, 정원에서

퇴위 후 니콜라이 일가는 상트페테르부르크 근교 알렉산드르 궁전에 연금되었다. 제국의 정점에서 죄수로 추락한 그는 역설적이게도 깊은 마음의 평온을 얻은 듯했다. 정원의 흙을 다듬고 삽을 들어 눈을 치웠으며, 밤에는 가족을 모아놓고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를 소리 내어 읽었다.

당시의 일기에는 국가의 짐을 벗어던진 한 남자의 조용하고 홀가분한 나날이 담겨 있다. 아이들과 온종일 시간을 보낼 수 있었던 이 짧은 연금기를, 니콜라이 생애 중 가장 행복했던 시절로 분석하는 기록도 있다.

그는 황제일 때 결코 갖지 못했던 것을 죄수가 되어서야 가졌다 — 자신의 아이들과 보내는 평범한 하루를.

하지만 역사의 소용돌이는 그들을 평화로운 정원 안에 머물게 두지 않았다. 1917년 11월, 레닌이 이끄는 볼셰비키가 무력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하면서 황실 가족의 운명은 완전히 얼어붙기 시작한다.

챠르스코예 셀로 궁전 정원
챠르스코예 셀로 궁전 정원. 니콜라이 2세와 아이들이 눈 쌓인 정원을 산책하는 장면. 잠깐의 평화.

동쪽으로

1918년 봄, 볼셰비키 당국은 황실 가족의 거처를 시베리아 토볼스크에서 우랄 지역의 공업 도시 예카테린부르크로 이감한다. 혁명에 반대하는 백군이 점차 동쪽으로 진격해 오자, 구시대의 상징인 황제 일가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더 깊은 내륙으로 숨기려 한 조치였다.

기차에 실린 황실 가족의 눈앞으로 러시아의 척박한 풍경이 끝없이 흘러갔다. 니콜라이는 흔들리는 차창 밖을 바라보았다. 혁명군의 감시 속에서 정확히 어디로 끌려가는지, 살아서 돌아올 수는 있을지 누구도 확신할 수 없었다.

기차 창문으로 광활한 러시아 설원을 바라보며
기차 창문으로 광활한 러시아 설원을 바라보는 장면. 차창에 서리가 끼어 있고, 뒤로 펼쳐지는 끝없는 대지.

이것은 로마노프 가족이 함께 탄 마지막 기차였다. 기나긴 여정의 끝에서 그들을 맞이한 것은 높은 목책으로 둘러싸인 저택, 당국이 암호명으로 부르던 “특별 목적의 집“이었다.

그 서늘한 이름 뒤에서 어떤 특별한 목적이 수행될 것인지, 그들은 아직 짐작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출처

본문 출처

니콜라이 2세 일기 (니콜라이 로마노프 황제 개인 일지)

로버트 K. 매시, 『니콜라이와 알렉산드라』 (Robert K. Massie, Nicholas and Alexandra, 1967)

올랜도 파이지스, 『인민의 비극: 러시아 혁명사 1891–1924』 (Orlando Figes, A People’s Tragedy, 1996)

피오트르 길리아르, 황태자 가정교사 회고록

이미지 출처

생성형 이미지: 본문에 사용한 생성형 이미지는 Google Gemini로 제작했다.

같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댓글

아직 댓글이 없어요. 이 이야기에 대한 첫 이야기를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