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두 번 결정적인 순간을 만났다. 첫 번째는 열네 살에 국경을 넘을 때였고, 두 번째는 서른다섯에 다시 국경을 넘으려 할 때였다. 첫 번째는 프랑스 왕비로서의 삶을 시작시켰고, 두 번째는 인간으로서의 삶을 끝냈다.
10월의 여자들
1789년 10월 5일, 파리의 시장 여자들 약 7천 명이 빗속에서 창과 도끼와 식칼을 손에 들고 베르사유로 행진을 시작했다. 표면상의 목적은 빵을 요구하는 것이었으나, 행렬이 커지고 분노가 몸집을 불릴수록 목표는 곧 왕비로 바뀌었다.
10월 6일 새벽, 군중이 베르사유 궁에 난입해 경비병 두 명을 살해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잠옷 차림으로 비밀 통로를 통해 왕의 침실로 달려갔다. 이것이 그녀가 베르사유에서 보낸 마지막 밤이었다. 날이 밝자 군중은 왕비를 내놓으라고 외쳤고, 마리는 루이와 함께 발코니에 나가 군중을 향해 깊이 고개를 숙였다. 더 이상 선택지가 없었다.
그날 오후, 왕실은 파리 튈르리 궁으로 “초대”된다. 말 그대로 압송이었다. 호송 마차 앞에는 군중이 꽂아든 창이 따라왔고, 창끝에는 전날 밤 살해당한 경비병 두 명의 머리가 매달려 있었다. 왕실이 파리에 도착할 때, 마리 앙투아네트는 이미 알고 있었다 — 이제 돌아갈 곳이 없다는 것을.

튈르리 — 황금 감옥
1789년 10월부터 1791년 6월까지 약 20개월 동안, 왕실은 튈르리 궁에 살았다. 루이 14세가 베르사유로 궁을 옮긴 뒤 100여 년간 사실상 방치되어 있던 건물이었기 때문에, 방에는 먼지가 쌓여 있었고 가구는 부족했으며 커튼은 낡아 빛이 바래 있었다.
표면적으로는 자유가 있었으나, 실제로는 사실상의 가택연금이었다. 밖에 나가려면 허가가 필요했고, 주변에는 항상 감시가 있었으며, 파리 시민들은 궁 앞에 모여 왕실을 욕했다.
이 시기에 마리는 정치적으로 적극적으로 변했다. 오스트리아와 스웨덴의 친척·친구들과 비밀 편지를 주고받고, 페르센 백작과 함께 혁명에 대한 저항의 길을 찾았다. 어린 시절 어머니에게 배우지 못했던 정치를 생존의 절박함 앞에서 뒤늦게 배웠다. 그녀는 더 이상 트리아농의 여자가 아니었다.
그리고 1791년 봄, 그녀는 마지막 한 수를 놓기로 했다.

도주 계획
1791년 봄, 페르센이 주도하는 탈출 계획이 구체화되었다. 목적지는 몽메디(Montmédy) — 프랑스 북동부의 요새 도시로,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현재의 벨기에)와 국경을 마주하고 있었다. 당시 그 땅은 마리의 친정인 합스부르크(유럽을 지배한 오스트리아 왕가로, 마리의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가 그 수장이었다)가 지배하고 있었다. 국경만 넘으면 사실상 친정 쪽 영토였다. 그곳에서 왕당파 군대를 모아 혁명에 맞선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첫째, 마차가 너무 컸다. 편안함과 왕실의 위엄을 포기하지 못한 루이 16세는 대형 베를린 마차를 고집했다. 무게와 크기 때문에 속도가 나지 않았고, 지나는 마을마다 눈에 띄었다. 둘째, 위장 명의가 복잡했다. 일행은 러시아 귀족 코르프 남작부인 가족으로 꾸몄다. 마리는 가정교사 ‘로셰 부인’으로, 루이는 종복 ‘뒤랑’으로, 여섯 살의 왕세자는 남작부인의 어린 딸로 여자아이 옷을 입고 나섰다. 셋째, 출발 시간이 지연되었다. 일설에 따르면, 페르센이 마부 복장으로 마차 위에 앉아 기다리는 동안 라파예트의 마차가 바로 그 앞마당을 가로질러 궁으로 들어갔고, 왕비는 어두운 파리 뒷골목을 혼자 방황하다 뒤늦게 합류했다. 밤 11시 출발 계획이었으나, 일행이 모두 마차에 오른 것은 자정을 넘긴 뒤였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루이 16세는 이 도주가 “탈출”이라고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는 출발 직전 자신의 의도를 설명하는 문서 — 혁명을 거부한다는 내용이 담긴 장문의 선언서 — 를 궁에 남겼다. 이 문서는 나중에 결정적인 증거가 된다.

도주의 밤
1791년 6월 20일 밤 11시, 왕실이 튈르리에서 빠져나갔다. 변장한 왕과 왕비, 두 아이, 엘리자베트 공주, 시종들이 마차에 올랐고, 페르센이 직접 마차를 몰고 파리 외곽까지 배웅한 뒤 거기서 헤어졌다.
6월 21일 새벽 2시, 마차는 파리 외곽의 본디(Bondy)에서 대형 베를린 마차로 갈아탔다. 너무 크고 너무 화려하고 너무 느린 마차였으나, 왕실은 편안함을 포기하지 않았다.
6월 21일 낮 동안 마차는 프랑스 동북부를 가로질렀다. 정오에는 Chaintrix에서 말을 바꾸고, 오후에는 뜨거운 햇빛 아래 밀밭을 지나, 저녁 무렵 Sainte-Menehould에 도착했다. 몽메디까지 약 80km를 남겨둔 마지막 큰 역참이었다. 여기까지만 들키지 않으면 되는 거였다.

바렌에서 누군가 알아보다
Sainte-Menehould의 역참에서 젊은이 한 명이 창가에 서 있었다. 장-바티스트 드루에, 역참장의 아들이자 열성 혁명 지지자였다. 마차가 말을 바꾸는 동안 그는 마차 안의 한 남자를 유심히 보았다. 그 얼굴이 어디서 본 적이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주머니에서 아시냐(assignat, 혁명정부 지폐)를 꺼냈다. 지폐에는 루이 16세의 초상이 새겨져 있었고, 그는 두 얼굴을 비교하기 시작했다. 한 얼굴이 한 지폐 위의 얼굴과 만났다. 프랑스의 운명이 이 대조 작업에 걸려 있었다.
확신이 선 드루에는 마차가 떠나자마자 말에 올라 다음 역인 바렌(Varennes)으로 질주했다. 지름길을 택해 마차보다 먼저 도착한 그는 바렌의 민병대를 깨웠고, 마차가 바렌에 도착할 때 마을의 아치형 교구다리는 이미 봉쇄되어 있었다. 마차는 멈췄고, 왕과 왕비는 내려 작은 마을의 잡화점 위층 방으로 안내되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파리의 추격대가 올 때까지 기다렸다.

침묵하는 귀로
6월 22일 아침, 파리에서 파견된 국민의회 의원들이 바렌에 도착해 왕실에 통보했다 — 파리로 돌아가야 한다고. 이때부터 돌아가는 길이 시작된다.
바렌에서 파리까지는 약 250km, 걸린 시간은 4일이었다. 이 4일 동안 마차 양쪽에는 수천 명의 사람들이 서 있었지만, 10월의 여자들과는 달랐다. 그들은 외치지도, 돌을 던지지도 않았다.
그들은 침묵했다. 그 침묵이 외침보다 무서웠다. 한 목격자는 이렇게 썼다. “마치 프랑스 전체가 왕과 왕비를 이미 매장해버린 듯했다.”
마차 안에서 마리 앙투아네트는 아이들을 끌어안고 있었다. 창밖을 보는 그녀의 얼굴에서, 한 시대가 조용히 닫히고 있었다.

그녀는 바렌에서 돌아온 그 길을 기억했을 것이다. 2년 뒤 수레 위에서, 그녀는 그보다 더 짧은 또 다른 길을 다시 갔다.
돌아올 수 없는 선
바렌 이전까지, 혁명은 아직 왕정과 공존하는 방식을 찾고 있었다. 입헌군주제 — 왕의 권한을 제한하되 왕을 유지한다는 구상이었고, 이것이 라파예트, 미라보 등 온건파의 노선이었다.
바렌 이후, 이 노선은 무너졌다. 왕이 스스로 “나는 혁명에 맞서는 쪽을 선택했다”고 선언한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그가 남기고 간 문서가 바로 그 선언이었다. 6월 21일 오후 국민의회 의사당에서 그 문서가 낭독되자 의원들은 경악했다. 그토록 침묵하던 왕이, 그토록 명확하게 혁명을 거부하고 있었다.
자코뱅 클럽이 세력을 얻었고, 공화주의가 목소리를 얻었다. 1792년 8월 튈르리가 다시 습격되었고, 9월에 왕정이 폐지되었으며, 1793년 1월 루이 16세가, 그해 10월 마리 앙투아네트가 차례로 단두대에 올랐다.
이 모든 것이 1791년 6월 21일 저녁, 바렌의 한 우체국장 아들이 지폐 한 장을 꺼내 비교한 그 사건으로부터 시작됐다.

사료 노트
- 1789년 10월 행진 규모: 약 6~7천 명 추정. 파리 중앙 시장(Les Halles) 여성들이 주축. 군중이 베르사유에 도착한 시각은 10월 5일 오후 5시경, 궁 난입은 10월 6일 새벽 5~6시경 (Fraser 2001 Chapter 21)
- 베르사유 경비병 사망과 효수: 10월 6일 새벽 난입 시 근위병 두 명(생디디에 및 바랑그쿠르로 기록됨)이 살해당했다. 그들의 머리는 창에 꽂힌 채 왕실 호송 마차를 따라 파리로 향했다 (당대 목격자 기록, Fraser 2001)
- 튈르리 유폐 기간: 1789년 10월 6일 ~ 1791년 6월 20일 (약 20개월). 이 시기 마리 앙투아네트와 오스트리아·스웨덴 친족 사이의 서신 교환은 Évelyne Lever (2005)가 원본을 정리
- 페르센과의 관계: 1778년경 교류 시작. 연인 여부는 학계 논쟁. Fraser(2001)는 긍정적, Stefan Zweig(1932)는 결정적 긍정, 일부 현대 학자들은 회의적
- 도주 계획의 가명: 일행은 러시아 귀족 코르프 남작부인 가족으로 위장. 실제 코르프 남작부인은 존재하는 인물로, 그녀의 양해 하에 위조 여권이 사용됨. 마리 앙투아네트는 가정교사 ‘로셰 부인(Madame Rochet)’, 루이 16세는 종복 ‘뒤랑(Durand)’, 여섯 살의 왕세자 루이 샤를은 남작부인의 어린 딸로 여자아이 옷을 입음 (Tackett 2003)
- 베를린 마차: 프로이센 베를린에서 유래한 대형 여행용 마차. 이번 도주에 사용된 것은 12인승 급의 초대형 모델로 무게와 크기 때문에 평균 속도가 느렸고, 어느 마을에서도 쉽게 눈에 띄었다. 루이 16세가 이 마차를 고집한 이유는 편의와 왕실의 체면이었다고 전해진다
- 드루에의 인지: Sainte-Menehould 역참장 장-바티스트 드루에의 아들(역참장 본인으로도 기록됨). 그는 말을 바꿔 타고 지름길로 바렌에 앞서 도착해 민병대에 경보를 울렸다. Tackett, When the King Took Flight (2003)이 시간대별 복원을 제공
- 루이 16세의 선언서: “Déclaration du roi adressée à tous les Français” — 6월 20일 튈르리 출발 전 집무실에 남긴 장문의 문서. 6월 21일 오후 국민의회에서 낭독됐다. 왕이 혁명을 사실상 거부한다는 내용으로, 바렌 체포 이후 공화주의의 결정적 근거가 됨
- “프랑스 전체가 왕과 왕비를 이미 매장해버린 듯했다”: 돌아오는 길에 동행한 의원 한 명의 회고. Timothy Tackett (2003)에서 출처 확인
출처
이미지 출처
생성형 이미지: 본문에 사용한 생성형 이미지는 Midjourney로 제작했다.
본문 출처
Antonia Fraser, Marie Antoinette: The Journey (2001) — Chapters 21–27
Timothy Tackett, When the King Took Flight (2003)
Simon Schama, Citizens: A Chronicle of the French Revolution (1989)
Évelyne Lever, Marie-Antoinette: Journal d’une reine (2005)
Stefan Zweig, Marie Antoinette (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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