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사
마리 앙투아네트 · 4편

이야기가 죽인 여자
— 마리 앙투아네트

(4)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이야기가 죽인 여자 — 마리 앙투아네트 (4)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1786년 5월, 파리 파를망은 로앙 추기경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재판정에 서지도 않았고, 법적으로는 아무 잘못도 없었다. 그러나 그 판결문이 읽히는 바로 그 순간, 파리의 골목에서는 이미 다른 종류의 판결문이 손에서 손으로 건네지고 있었다.

목걸이

647개의 다이아몬드, 총 2800캐럿의 거대한 목걸이가 있었다. 원래는 루이 15세가 애인 뒤 바리를 위해 주문한 것이었으나, 왕이 죽자 보석상들은 이것을 팔 사람을 찾지 못했다. 1785년 당시 가격은 160만 리브르 — 당시 중형 군함 한 척의 건조 비용에 맞먹는 금액이었다.

보석상 뵈메르와 바상주는 수년간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이것을 사라고 압박했으나, 마리는 계속 거절했다. 한 번은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목걸이가 아니라 군함이다.”

그렇게 목걸이는 팔리지 않은 채 보석상의 금고에 남아 있었다. 그러나 그 목걸이의 이야기는, 파리 어딘가에서 이미 다른 사람의 귀에 들어가 있었다.

1785년의 다이아몬드 목걸이
647개의 대형 다이아몬드로 구성된 3단 목걸이가 어두운 보라색 벨벳 위에 놓여 있고, 촛불 아래에서 찬 빛을 내며 반짝인다. 주위에는 보석상의 설계 스케치와 장부가 놓여 있다.

사기꾼

파리에는 잔 드 라 모트라는 여자가 있었다. 자신을 발루아 왕가의 후손이라고 불렀으나, 실제로는 몰락한 시골 귀족의 딸이었고 어린 시절을 빈민 구제소에서 보낸 여자였다. 그녀는 파리 곳곳에서 자신이 왕비의 측근이라며 거짓말을 하고 다녔다.

1784년 초, 그녀는 로앙 추기경에게 접근했다. 로앙은 과거 오스트리아 대사 시절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미움을 샀고, 그 결과 마리 앙투아네트에게도 차가운 대우를 받고 있었다. 왕비의 총애를 얻는 것이 그의 인생의 목표였다.

잔은 로앙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왕비의 절친이다. 왕비가 지금 그 목걸이를 원하지만, 왕에게 들키지 않고 사려 한다. 당신이 대리 구매자로 나서주면 왕비가 당신을 영원히 고마워할 것이다.”

로앙은 믿었다 — 사실은 믿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잔은 그가 믿고 싶어 하는 것을 보여주기로 했다.

위조의 순간
1784년 초 파리의 어두운 방에서 촛불 아래, 잔 드 라 모트가 거위 깃펜으로 'Marie Antoinette de France'라는 서명을 위조하고 있다. 책상 위에는 연습용 종이들과 인장, 편지들이 흩어져 있다.

밤의 정원

1784년 8월, 베르사유 정원에 밤이 내렸다. 로앙 추기경은 왕비를 만나기로 약속되어 있었고, 잔은 마리 앙투아네트와 키가 비슷한 한 매춘부(니콜 올리바)를 고용해 왕비처럼 꾸몄다.

약속의 장소는 베누스의 숲이었다. 달빛이 희미한 밤, 하얀 드레스의 여자가 숲에서 나타나 로앙에게 장미 한 송이를 건네며 속삭였다. “당신을 용서했어요.” 그리고 사라졌다.

로앙은 그날 밤 자신이 왕비와 만났다고 확신했다. 그 뒤로 그는 160만 리브르짜리 목걸이에 대리 구매자로서 서명했고, 목걸이는 그대로 잔의 손에 들어가 해체된 채 런던에서 팔렸다.

숲 속의 약속
1784년 8월 베르사유 베누스의 숲, 달빛 아래. 붉은 성직복의 로앙 추기경이 한쪽 무릎을 꿇고, 얼굴이 그림자와 부채에 가려진 흰 드레스의 여자로부터 장미 한 송이를 받는다. 미스트가 낮게 깔린 신비로운 분위기.

재판

일 년이 조금 지난 1785년 8월, 보석상이 분할 지불을 청구하며 사건이 발각되었다. 왕궁이 아무것도 모른다고 답하면서 모든 사기의 전말이 드러났고, 루이 16세는 격분해 로앙 추기경을 체포했다.

그러나 여기서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재판은 공개되었고, 파리 파를망(고등법원)이 재판을 맡았다. 그리고 1786년 5월, 파를망은 로앙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표면적 이유는 이러했다. 로앙은 진정한 사기 피해자였으며, 왕비가 실제로 자신을 만나주었다고 믿을 만한 이유가 있었다는 논리였다. 그러나 더 깊은 이유는 따로 있었다. 파를망은 오랫동안 왕실과 대립해 왔고, 이 기회에 왕비에게 타격을 주고 싶어 했던 것이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법적으로는 아무 잘못이 없었다. 그러나 파리의 시민들은 판결을 이렇게 읽었다. 그 말이 맞다면, 왕비가 뭔가 수상한 짓을 했기에 법원조차 왕비에게 불리하게 판결했다는 뜻 아닌가. 사실은 정반대였지만, 이야기는 이미 사실을 넘어서고 있었다.

판결의 순간
1786년 5월 파리 파를망의 판결 선고 장면. 법관들이 단상에 앉아 있고, 붉은 성직복의 로앙이 경비와 함께 서 있다. 방청석은 흥분한 귀족들로 가득하다. 왕비는 출석하지 않았다.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건 (L’Affaire du Collier)프랑스 역사상 가장 유명한 사기 사건 중 하나. 이 사건에서 마리 앙투아네트는 본인이 전혀 관여하지 않았음에도 공적 이미지가 치명적으로 훼손되었다. 나폴레옹은 훗날 말했다. “왕비의 죽음은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건에서 시작되었다.” 사건 5년 후 혁명이 일어났고, 8년 후 그녀는 단두대에 올랐다.

리벨

그리고 그 “이야기”가 자라나는 토양은 이미 몇 년 전부터 파리 전역에 깔려 있었다.

1780년대 중반, 파리의 거리에는 리벨(libelles)이라 불리는 금지된 인쇄물이 넘쳐났다. 이것들은 왕실과 귀족에 대한 스캔들과 풍자, 그리고 포르노그래픽한 팜플렛이었다. 정식 출판은 금지되었지만, 지하의 인쇄소들에서 무수히 인쇄되어 거리의 암시장에서 팔렸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리벨의 가장 인기 있는 소재였다. 그녀가 수많은 남자와 여자와 관계를 가졌다는 날조된 “회고록”, 그녀가 낳은 아이가 루이 16세의 아이가 아니라는 주장, 그녀가 국고를 오스트리아로 빼돌린다는 주장까지 — 이 텍스트들은 파리 시민의 머릿속에 스며들어 실제의 그녀를 대체했다. 사람들이 “마리 앙투아네트”라는 이름을 들을 때 떠올리는 이미지는, 이제 베르사유 궁전에 사는 그 여자가 아니라 리벨들이 만든 그림자였다.

그 그림자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것은, 그녀가 한 번도 하지 않은 말 한 문장이었다.

지하 문학의 유통
1787년경 파리의 해질녘 골목. 검은 외투의 상인이 가판대에 소책자들을 펼쳐놓고, 시민 하나가 조심스럽게 동전을 건네며 구매한다. 주변에는 다른 구경꾼들이 있고, 젖은 돌길에 등불이 희미하게 비친다.

태어나지 않은 문장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어라(Qu’ils mangent de la brioche).”

프랑스어 원문에서 쓰인 단어는 “brioche”(버터와 달걀을 많이 넣어 만든 고급 빵의 일종, 흔히 브리오슈라 부르는 것)이지 케이크가 아니다. 그러나 번역은 여전히 관례적으로 “케이크”라고 쓴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이 말을 한 적이 없다 — 이것은 사료로 완전히 확인된 사실이다.

이 문장의 최초 기록은 장-자크 루소의 고백록(Les Confessions) 에 나온다. 제6권이 포함된 초반부가 1760년대 중반에 집필되었을 때, 루소는 “어떤 위대한 공주”가 이 말을 했다고 썼다. 그 시점을 주목해야 한다. 그때 마리 앙투아네트는 아직 열 살 안팎의 아이였고, 빈에 있었으며, 프랑스 땅을 밟기도 전이었다. 그녀가 이 말을 할 수 있었을 리 없다.

그러나 19세기 초반부터 이 말은 그녀에게 붙어 다녔다. 왜인가? 이야기가 그녀에게 너무나 잘 맞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왕비라고 믿고 싶어 하는 그 모습 — 백성의 고통에 무관심한, 사치에만 빠진 여자 — 에 완벽하게 들어맞았기 때문이다.

사실이 아니었다. 그리고 사실이 아닌 것이 그녀를 죽였다.

한 번도 하지 않은 말
어두운 마호가니 책상 위에 펼쳐진 가죽 장정 책. 왼쪽 페이지에는 'Qu'ils mangent de la brioche'라는 문장이 유려한 깃펜체로 갓 쓰여 있다. 책상에는 잉크병과 깃펜, 촛대가 놓여 있다. 페이지 위로는 18세기 궁정 복식 차림의 여성 실루엣이 그림자로 드리워져 있지만, 방 안에 실제 여성은 없다. 그림자의 끝이 정확히 그 문장 위에 닿아 있다.

진짜 부채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어라”가 진실이 아니었다면, 왕실이 파산 직전이었다는 것도 진실이 아니었을까? 그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프랑스 왕실이 파산 직전이었던 것은 맞지만, 왕비의 사치는 거의 상관이 없었다.

1780년대 프랑스의 재정 위기는 두 개의 전쟁 때문이었다. 첫째는 7년 전쟁(1756~1763)으로, 프랑스가 영국에 패배해 영토를 잃었다. 둘째는 미국 독립전쟁(1775~1783)으로, 프랑스가 영국을 약화시키기 위해 미국을 지원한 것이 특히 치명적이었다.

1788년의 재정 상황을 보자. 국가 예산의 거의 절반(약 43퍼센트)이 이자 상환에 사용되고 있었고, 세금 체계는 여전히 중세적이었다. 귀족과 성직자는 거의 세금을 내지 않았고, 세금의 거의 전부가 제3계급, 즉 평민에게서 나왔다. 가난한 사람들이 더 많이 냈고, 부자들은 비켜나갔다.

왕실 궁정 유지비 전체는 예산의 약 6퍼센트에 불과했고, 그중에서도 마리 앙투아네트 개인의 의상, 보석, 프티 트리아농 개축에 쓰인 비용은 전체 예산의 1퍼센트에도 미치지 못했다. 그녀의 지출은 이전 시대의 왕비들, 혹은 역대 국왕의 정부들이 썼던 금액과 비교해 유별나게 많지 않았다.

그러나 대중의 분노는 귀족 전체가 아니라, 한 명의 여자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무지의 순간
1787년 베르사유 프티 트리아농 응접실. 흰 모슬린 드레스의 마리 앙투아네트가 두 아이 — 여덟 살 딸과 여섯 살 아들 — 에게 책을 읽어주고 있다. 따뜻한 오후의 햇살, 핑크빛 소파, 꽃병. 창밖으로 회색 하늘 아래 파리 시내의 희미한 실루엣이 보인다.

한 여자는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고 있었다. 그녀의 이름으로 태어난 다른 여자는, 그 시간에 파리의 거리에서 매춘부와 괴물과 적국의 간첩이 되어가고 있었다.


1789년의 전야

그리고 그 분노가 폭발하는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1789년 5월, 175년 만에 삼부회(États généraux)가 베르사유에서 소집되었다. 7월 14일에는 바스티유가 함락되었고, 10월에는 여자들이 베르사유로 행진해 왔다.

삼부회(États généraux)프랑스 왕국의 신분별 대표 회의. 제1신분 성직자, 제2신분 귀족, 제3신분 평민 대표가 따로 모여 왕에게 의견을 내는 기구였다. 1614년 이후 열리지 않다가, 국가 재정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루이 16세가 1789년에 다시 소집했다. 그러나 표결 방식을 둘러싼 갈등 속에서 제3신분은 스스로를 국민의회라고 선언했고, 이것이 프랑스혁명의 직접적인 출발점이 되었다.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이 모든 것은 갑작스러웠을 수 있다. 그러나 실은 갑작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파리에서는 이미 20년이 넘게 그녀를 미워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리벨의 페이지들, 골목의 속삭임, 카페의 수다 — 모든 것이 아주 천천히, 아주 철저하게 그 순간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혁명이 일어나자, 대중이 그 분노를 쏟을 대상은 이미 정해져 있었고, 그 대상의 이름도 그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 오스트리아 여자(L’Autrichienne).” 이것이 리벨들이 그녀를 부르던 이름이었고, 이제는 모든 파리가 그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폭풍 전야
1789년 7월 13일 밤, 파리 생-앙투안 지구의 거리. 횃불을 든 노동자 군중이 거리를 메우고 있다. 즉석 무기, 벽에 붙은 벽보, 멀리 조립 중인 바리케이드. 보랏빛 하늘을 배경으로 바스티유 성채의 실루엣이 솟아 있다.

사료 노트

  • 다이아몬드 목걸이의 스펙: 647개 다이아몬드, 총 약 2800캐럿(약 570그램). 보석상 뵈메르·바상주의 주문·지불 기록은 국립 고문서관(Archives Nationales)과 Beckman How to Ruin a Queen (2014) Appendix에 수록
  •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건 세부: Fraser (2001) Chapter 18, Jonathan Beckman How to Ruin a Queen (2014) 참고
  • 재판 경과: 1785년 8월 사건 발각, 1786년 5월 31일 파를망이 로앙에게 무죄 선고. 나폴레옹의 “왕비의 죽음은 다이아몬드 목걸이에서 시작되었다” 발언은 세인트 헬레나 시기 회고에 수록
  • 리벨의 유통 규모와 내용: Chantal Thomas, The Wicked Queen (2001) Part II의 텍스트 분석이 결정판. Robert Darnton의 The Forbidden Best-Sellers of Pre-Revolutionary France (1995)도 유통 경로를 상세히 분석
  •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의 기원: 루소 고백록 제6권에 “어떤 위대한 공주(une grande princesse)”의 발언으로 등장. Fraser (2001) Appendix에서 이 말이 마리 앙투아네트의 것이 아님을 상세히 논증. 1843년 알퐁스 카르(Alphonse Karr)가 처음으로 그녀에게 돌렸다는 설도 있다
  • 프랑스 재정 구조 수치: 1780년대 말 국가 예산의 약 43%가 부채 이자 상환에 투입, 궁정 유지비 약 6%, 왕비 개인 지출 1% 미만. Simon Schama, Citizens (1989), John Hardman (2015)에서 상호 확인
  • L’Autrichienne: 리벨에서 마리 앙투아네트를 부르는 고정 표현. 표면적으로는 “오스트리아 여자”이나 “chienne(암캐)”와 음성적으로 겹치는 의도적 모욕
출처

이미지 출처

생성형 이미지: 본문에 사용한 생성형 이미지는 Midjourney로 제작했다.

본문 출처

Antonia Fraser, Marie Antoinette: The Journey (2001)

Chantal Thomas, The Wicked Queen: The Origins of the Myth of Marie-Antoinette (Zone Books, 2001)

Jonathan Beckman, How to Ruin a Queen: Marie Antoinette and the Diamond Necklace Affair (2014)

Simon Schama, Citizens: A Chronicle of the French Revolution (1989)

Robert Darnton, The Forbidden Best-Sellers of Pre-Revolutionary France (1995)

Jean-Jacques Rousseau, Les Confessions (유고, 1782, Book V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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