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사

그 자리에 서다 — 로마노프의 현장 일곱 곳

그 자리에 서다 — 로마노프의 현장 일곱 곳

역사적 사건은 추상적인 텍스트가 아니라 구체적인 흙과 벽돌 위에서 벌어진다. 로마노프 제국의 몰락 역시 러시아 지도 위에 선명한 좌표들을 남겼다. 앞서 다룬 일련의 사건들이 거쳐간 현장들을 사건의 순서대로 짚어본다. 황제가 서명을 남긴 기차역부터 일가가 은폐된 채 묻힌 늪지대까지. 어떤 곳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어떤 곳은 다른 이름으로 남아 있다.

니콜라이 2세 로마노프 가족 공식 사진
니콜라이 2세 로마노프 가족 공식 사진. 황제 부부와 다섯 자녀(올가, 타티아나, 마리아, 아나스타샤, 알렉세이)가 함께 찍힌 마지막 시대의 기록.
Bundesarchiv / Wikimedia Commons / CC BY-SA 3.0 DE

알렉산드르 궁전 — 가택연금 268일

차르스코예 셀로에 위치한 알렉산드르 궁전은 로마노프 일가가 가장 오래 거주했던 공간이었다. 그러나 혁명 직후 이곳은 곧바로 감옥이 되었다. 퇴위 시점부터 약 268일 동안 일가는 자신들의 집에 갇혔다. 한때 무도회가 열리던 정원은 하루 한 시간의 산책만이 허락된 통제 구역으로 바뀌었다.

현재 이 궁전은 대대적인 복원 작업을 거쳐 박물관으로 운영 중이다. 니콜라이 2세와 알렉산드라 황후가 사용하던 침실과 서재 등이 복원되어 공개되어 있다.

차르스코예 셀로 알렉산드르 궁전
차르스코예 셀로의 알렉산드르 궁전 외관. 신고전주의 양식의 노란 건물과 정원. 로마노프 일가가 혁명 후 268일간 가택연금된 공간.
Florstein / Wikimedia Commons / CC BY-SA 4.0

토볼스크 총독 관저 — 시베리아의 겨울

임시정부를 무너뜨린 볼셰비키는 황실 일가를 시베리아 오지 토볼스크로 이송했다. 외부와 단절된 이 도시는 구출 시도를 원천 차단하기 위한 유배지였다. 1917년 8월부터 약 8개월, 일가는 옛 총독 관저에서 생활했다.

강이 얼어붙는 혹독한 겨울이 지나는 동안 알렉세이의 혈우병 발작이 가장 심하게 일어났다. 니콜라이는 마당에서 나무를 패며 무력한 시간을 견뎠다.

토볼스크 유배 중 나무를 패는 니콜라이 2세
토볼스크 유배 중 마당에서 나무를 패고 있는 니콜라이 2세. 1917-1918년 촬영된 흑백 사진.
Wikimedia Commons / Public domain

황제는 나무를 팼다. 제국은 이미 없었고, 남은 것은 몸을 쓰는 일이었다.


이파티예프 저택 — 지금은 없는 집

예카테린부르크 보즈네센스카야 거리에 있던 이파티예프 저택은 지역 공병 장교 소유의 2층 석조 건물이었다. 볼셰비키는 이 집을 징발해 특별 목적의 집이라 불렀다. 이곳에서 78일간 감금되었던 일가는 지하방에서 처형당했다.

처형 현장을 조사했던 백군 수사관 니콜라이 소콜로프의 기록이다.

총알 자국이 가장 집중된 곳은 바닥에서 조금 위쪽의 벽면이었다. 나는 혈흔과 흩어진 파편들을 통해 그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즉시 알아차렸다.

낮은 높이에 집중된 탄흔은 바닥에 쓰러진 자들에게 재차 총을 겨눴음을 말해준다. 이 현장은 1977년 사라졌다. 성지화를 우려한 정치국의 지시로 당시 공산당 서기 보리스 옐친이 한밤중에 굴착기를 동원해 건물을 철거했다. 건물은 없어졌지만, 소콜로프가 남긴 흑백 사진들이 그날의 공간을 증언한다.

이파티예프 저택 — 처형 이전 모습
예카테린부르크 이파티예프 저택의 역사 사진. 2층 석조 건물. 1918년 처형이 이루어진 '특별 목적의 집'. 1977년 철거됨.
Wikimedia Commons / Public domain

가니나 야마 — 폐광산이 수도원이 되다

예카테린부르크에서 약 15킬로미터 떨어진 콥탸키 숲 깊은 곳에 가니나 야마라 불리는 폐광산이 있다. 처형 직후 시신 11구는 이곳으로 옮겨져 수직 갱도에 투기되었다. 그러나 얕은 갱도로는 은폐가 불충분하다고 판단한 유로프스키는 이틀 뒤 시신을 꺼내 더 깊은 곳으로 이동시켰다.

소련 붕괴 후, 러시아 정교회 수도사들이 이 광산 터에 성 황제와 순교자들의 수도원을 세우고 9개의 목조 예배당을 올렸다. 매년 7월 17일이면 수천 명의 순례자가 이곳에서 철야 기도를 드린다.

가니나 야마 수도원
예카테린부르크 외곽 콥탸키 숲의 가니나 야마 수도원. 러시아 정교회 목조 예배당이 숲속에 자리잡고 있다. 로마노프 가족의 시신이 처음 투기된 폐광산 터 위에 세워졌다.
Wikimedia Commons / CC BY 4.0

포로센코프 로그 — 61년간 아무도 몰랐던 진흙 길

최종 매장지는 가니나 야마에서 몇 킬로미터 떨어진 늪지대였다. ‘돼지의 협곡’이라는 뜻의 포로센코프 로그다. 1918년 7월 19일 새벽, 처형 책임자들은 시신 9구를 이 진흙 구덩이에 묻고 철도 침목으로 덮어 평범한 길로 위장했다.

1979년 역사학자 아브도닌이 비밀리에 위치를 찾아냈으나 소련 붕괴까지 다시 묻어두었다. 1991년 공식 발굴이 이루어졌고, 2007년 70미터 떨어진 지점에서 알렉세이와 마리아의 유골이 추가로 발견되었다.

지금은 발굴 현장 옆 작은 십자가 표지판이 순례자들을 맞이한다.

포로센코프 로그 — 침목 다리
포로센코프 로그(돼지의 협곡)의 철도 침목으로 만든 다리. 1918년 유로프스키가 로마노프 일가의 시신 9구를 이 아래 묻고 침목으로 덮어 길처럼 위장한 자리.
Wikimedia Commons / Public domain

피의 성당 — 지운 자리에 세운 것

이파티예프 저택이 철거된 그 빈자리에 2003년 러시아 정교회가 피의 성당을 건립했다. 정식 명칭은 ‘러시아 땅에서 빛나는 모든 성인들을 기리는 피의 성당’. 성당 내부, 처형이 이루어진 지하실 위치에는 별도의 추모 제단이 마련되어 있다.

매년 7월 17일, 러시아 전역에서 모인 수만 명의 순례자가 이 성당 앞에서 행진을 시작한다. 예카테린부르크 도심부터 가니나 야마까지 21킬로미터를 밤새워 걷는다.

지우려 할수록 선명해지는 것들이 있다. 볼셰비키는 건물을 지웠고, 그 자리에 더 큰 건물이 들어섰다.

예카테린부르크 피의 성당
예카테린부르크 피의 성당(Church on the Blood). 러시아 정교회 성당. 이파티예프 저택이 철거된 자리에 2003년 건립됨. 황금 돔과 흰 외벽.
Wikimedia Commons / CC BY 4.0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 — 마지막 안식처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는 로마노프 황실 대대의 묘지다. 처형 80주년을 맞은 1998년 7월 17일, 발굴된 니콜라이 2세 일가의 유골이 이곳에 안장되었다.

그러나 무덤의 주인은 아직 전부 모이지 않았다. 2007년 발견된 알렉세이와 마리아의 유골은 러시아 정교회와 정부 사이의 진위 논쟁으로 아직 안장되지 못하고 있다. 처참하게 흩어진 황실 일가 전원의 유해가 한 곳에 모이는 날은 아직 오지 않았다.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 로마노프 대공 묘역
상트페테르부르크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 내 로마노프 황실 묘역. 성당과 부속 건물이 보인다. 1998년 니콜라이 2세 일가의 유골이 이곳에 안장되었다.
Wikimedia Commons / CC BY 2.0
출처

본문 출처

야코프 유로프스키, 비망록 (Yurovsky’s Note, 1920년)

로버트 K. 매시, 『로마노프: 황조의 최후』 (Robert K. Massie, The Romanovs: The Final Chapter, 1995)

올랜도 파이지스, 『인민의 비극: 러시아 혁명사 1891–1924』 (Orlando Figes, A People’s Tragedy, 1996)

헬렌 라파포트, 『로마노프 자매들』 (Helen Rappaport, The Romanov Sisters, 2014)

니콜라이 소콜로프, 『황실 가족의 살해』 (Nikolai Sokolov, The Murder of the Tsar’s Family, 1924)

이미지 출처

이미지 출처: 본문에 사용한 사진은 Wikimedia Commons에서 수집했다. 각 이미지의 저작권 및 라이선스는 캡션에 표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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