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성대군의 단종복위운동은 어떻게 끝났나? 세종의 여섯째 아들 금성대군은 1457년 유배지 순흥에서 부사 이보흠과 지역 인사들을 규합해 단종 복위를 도모했다. 계획은 관노의 고발로 실행 전에 드러났다. 금성대군과 관련자들이 처벌됐고, 세조 정권은 순흥부를 폐지해 옛 순흥 지역을 이웃 고을에 편입시키고 관아까지 허물었다. 이 사건은 단종을 제거하는 마지막 정치적 빌미가 됐다.

한 고을을 없애라는 명령
1457년 8월 2일, 이조판서가 세조에게 한 가지 처분을 청했다. 고을을 없애자는 처분이었다.
대상은 경상도 순흥부(順興府)였다. 땅과 주민을 이웃 고을의 관할로 넘기고 창고와 관사를 부순 뒤, 관아가 서 있던 터까지 허물자는 내용이었다. 조정은 순흥의 관리와 백성이 금성대군 이유(李瑜)의 반역을 따랐다고 규정했다. 고을을 없애는 것만으로 부족하다며 호장·기관·장교 우두머리들의 가족까지 강원도의 쇠잔한 역참으로 보내자고 했다.
세조는 따랐다.
뒤이어 옛 순흥 땅은 풍기군·영천군·봉화현으로 갈라졌다. 행정지도에서 순흥이라는 이름이 사라졌다. 한 왕족의 유배지에서 시작된 모의가 한 지역 전체의 죄가 된 것이다.
단종을 되찾으려다, 한 고을이 지도에서 사라졌다.
두 숙부의 약속
금성대군은 세종과 소헌왕후의 여섯째 아들이었다. 이름은 유(瑜). 수양대군, 훗날의 세조와는 친형제였다. 단종에게는 두 사람 모두 작은아버지였다.

그의 집안에는 왕위 다툼으로 죽은 사람의 기억이 하나 더 얽혀 있었다. 1437년, 금성대군은 태조의 막내아들 이방석의 후사로 출계했다. 자식 없이 죽은 이방석의 양자가 되어 그의 가계와 제사를 잇도록 족보를 옮긴 것이다. 이방석은 조선의 첫 왕세자였지만 제1차 왕자의 난 때 이복형 이방원에게 제거된 인물이었다.
기묘하게도 왕위 다툼으로 죽은 어린 세자의 제사를 맡게 된 왕자가, 훗날에는 왕위를 빼앗긴 어린 조카를 복위시키려다 죽었다.
1452년 문종이 죽고 열두 살 단종이 왕위에 올랐다. 인물 전기에 따르면 수양대군과 금성대군은 사정전에서 물품을 하사받으며 어린 왕을 좌우에서 보필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그 약속은 오래가지 않았다.
1453년 계유정난이 일어났다. 수양은 김종서와 황보인을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했다. 이어 김종서 등이 안평대군을 왕으로 세우려 했다는 혐의를 내세워 안평대군을 강화 교동으로 보낸 뒤 사사했다. 세종의 셋째 아들 안평대군은 수양의 친동생이자 단종의 숙부였다. 수양에게는 친동생을, 단종에게는 또 다른 작은아버지를 죽인 사건이었다.
왕이 된 형, 유배된 동생
1455년, 금성대군은 무사들과 결탁해 세력을 키운다는 혐의를 받았다. 관직과 지위를 빼앗기고 삭녕으로 보내졌다. 삭녕은 지금의 경기도 연천군과 강원도 철원군에 걸친 옛 고을이다. 유배지는 이후 오늘날 경기도 광주시를 중심으로 한 옛 광주를 거쳐, 1456년 현재의 경북 영주시 순흥면 일대로 바뀌었다.
세조의 시대에 작성된 기록은 그를 고결한 충신으로 그리지 않는다. 재산이 많고 사치했으며 무사를 불러 활을 쏘고 사냥하면서 사람을 모았다고 적었다. 적대적인 평가와 별개로 분명한 사실은 있다. 금성대군은 아무 힘도 없는 비운의 왕족이 아니었다. 돈과 사람, 옛 종과 무사를 움직일 수 있는 왕자였다.
같은 해 수양대군은 왕이 되었고, 금성대군은 가시나무 울타리 안에 갇혔다. 위리안치(圍籬安置)는 집 둘레를 가시울타리로 막아 외부와의 접촉을 끊는 무거운 유배형이었다.

마지막 복위운동
1456년 사육신의 복위 계획이 발각됐다. 성삼문·박팽년 등이 처형됐고, 단종은 이듬해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영월로 유배됐다.
금성대군이 그 소식을 들은 곳이 순흥이었다.
순흥은 변방의 작은 산촌이 아니었다. 고려 이래 부·도호부로 이어진 큰 고을이었고, 영남에서 죽령을 넘어 한양 쪽으로 향하는 길목과 가까웠다. 순흥에서 단종이 있는 영월까지는 백 리가 채 되지 않았다. 조선시대 백 리를 오늘날 거리로 환산하면 약 40km 안팎이다. 순흥에는 부사 이보흠(李甫欽)이 있었고, 지역의 기관과 향리, 품관과 군사들이 있었다.

궁 안에서 세조를 제거하려 했던 사육신의 계획과 달리, 순흥의 계획은 지방에서 군사를 일으켜 영월의 단종을 되찾는 방식이었다. 암살이 아니라 지역 봉기에 가까웠다.
《세조실록》에 실린 의금부 조사 기록은 그 구상을 놀랄 만큼 구체적으로 적었다. 먼저 영천을 치고, 안동에서 금성대군 집안의 가동을 모아 2,000~3,000명의 병력을 얻는다. 죽령과 초점의 길을 막아 한양과의 연결을 끊는다. 경상도 여러 고을에 사람을 보내 호응을 끌어낸다. 여기서 영천(榮川)은 오늘날 경북 영천시(永川市)가 아니라 현재 영주시 일대에 있던 옛 고을이다.

단종이 영월로 유배된 날은 음력 6월 21일, 관노 이동의 고발이 기록된 날은 6월 27일이다. 실록의 순서만 따르면 영월 유배 소식을 듣고 거사를 구체화했다가 발각되기까지 겨우 엿새다. 모든 계획이 엿새 만에 생겼다고 보기보다는 이전부터 이어진 불만이 단종의 유배를 계기로 급격히 움직였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실행 가능성이 얼마나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조사 기록에는 순흥부사와 향리·품관·군사, 안동의 가동까지 여러 집단이 등장한다. 실제로 몇 명이 가담했는지는 확인하기 어렵지만, 지역의 행정·군사망을 이용하려 한 계획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군주가 욕을 당하면
의금부의 조사 기록에서 금성대군은 거사를 결심한 까닭을 이렇게 설명했다.
군주가 욕을 당하면 신하는 죽어야 한다.
그는 맹세문도 만들었다고 한다. 간신이 정권을 휘두르고 주상을 쫓아내 사직을 뒤집었으니 한마음으로 바로잡자는 내용이었다. 세조를 정당한 새 임금으로 인정하지 않고, 쫓겨난 단종을 다시 왕위에 올리겠다는 선언이었다.
명주 띠 한 가닥
계획은 군사가 모이기도 전에 무너졌다.
1457년 6월 27일, 안동의 관노 이동(李同)이 한양에 도착했다. 그는 금성대군이 순흥에서 사람들과 결탁해 불궤한 일을 꾀하고 있다고 고발했다.
이동은 우연히 소문을 들은 외부인이 아니었다. 뒤에 정리된 의금부 기록에는 그 역시 금성대군이 불러 모은 사람들 가운데 한 명으로 등장한다. 계획에 포함되었다가 방향을 바꾼 고발자였던 것이다.
증거도 있었다.
금성대군에게 받았다는 명주 띠였다. 선물로 사람을 묶으려 했던 왕자의 방식이, 역으로 그를 묶는 물증이 됐다.

세조는 그날 바로 순흥·예천·안동으로 조사관을 보냈다. 금성대군과 처자를 서울로 압송하라는 명령도 내려졌다. 후대 기록에는 관노가 벽 사이에 숨어 격문 작성을 엿듣고 초고를 훔쳤다는 이야기가 더해졌다. 어쨌든 사건 당시 《세조실록》이 가장 먼저 적은 물건은 종이가 아니라 띠였다.
이보흠은 공모자였나
그런데 《세조실록》에 실린 이보흠의 진술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이보흠은 단순한 시골 수령이 아니었다. 세종의 명을 받아 대구에서 사창제를 시험했고, 《세종실록》 편찬에도 참여한 관료였다. 사창은 마을 사람들이 곡식을 공동으로 비축했다가 흉년이나 춘궁기에 빌려주는 구휼 제도였다. 문종과 단종의 시대에 경력을 쌓은 이보흠이 세조 즉위 뒤 순흥을 맡았고, 그곳에 단종의 또 다른 숙부가 유배되어 왔다. 두 사람의 만남은 우연이었지만 정치적으로는 위험한 조합이었다.
의금부 기록은 금성대군이 칼을 빼 이보흠에게 맹세문 서명을 강요했다고 적는다. 그러나 같은 기록에는 이보흠이 금성대군과 죽령·초점의 길을 막을 방법을 의논했다는 진술도 나온다. 칼에 위협받아 서명했는지, 처음부터 계획에 가담했는지 기록만으로는 가리기 어렵다.
후대에 단종과 충신들의 명예가 회복되면서 이보흠은 금성대군과 함께 복위를 도모한 충신으로 기억됐다. 반대로 사건 225년 뒤인 1682년(숙종 8), 순흥을 다시 고을로 복구하자는 논의에서는 금성대군이 이보흠을 협박해 격문을 쓰게 했다는 설명이 나왔다. 순흥이 자발적으로 반역에 가담한 ‘역향’이 아니어야 복구의 명분도 생겼기 때문이다.
오늘날 금성대군 신단에도 이보흠의 단이 따로 마련돼 있다.
세조 때의 조사 기록은 이보흠을 협박받은 관리로도, 구체적인 계획을 의논한 공모자로도 적었다. 조선 후기는 그를 금성대군과 함께 죽은 충신으로 기렸다. 어느 대목을 앞세우느냐에 따라 이보흠의 역할이 달라진다.
순흥을 없애라
조정의 처벌은 빨랐다.
순흥부가 폐지됐다. 옛 순흥의 땅은 이웃 고을의 행정구역으로 편입됐고, 주민들도 새로 편입된 고을의 호적과 관할 아래 들어갔다. 창고와 관사는 파괴됐고 관아 터까지 허물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관원과 향리의 가족도 연좌됐다.

몇 달 뒤 의금부는 지역의 품관·군사 등 여섯 명을 참형에 처했다. 이보흠은 장 100대와 3,000리 유배형을 받은 뒤 결국 죽었다. 대신들은 여러 날 금성대군도 죽여야 한다고 요구했다.
세조는 처음에는 동생을 살리겠다고 버텼다. 금성대군이 궁박한 처지에서 그런 일을 벌였으니 어찌 크게 벌하겠느냐고 했고, 동생의 모반을 용서했던 요나라 태조의 고사까지 들었다. 대신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금성대군은 이미 종친의 명부에서 이름이 끊겼으니 골육으로 볼 수 없다고 맞섰다. 왕과 신하들이 며칠 동안 주고받은 것은 법리만이 아니었다. 왕이 친동생을 죽이라는 요구에 어디까지 저항할 수 있는가를 시험하는 과정이었다.
마침내 세조가 사사를 명했다.
왕이 된 형이 유배된 동생에게 죽음을 내렸다.
그러나 더 오래 남은 형벌은 따로 있었다. 순흥은 더 이상 고을이 아니었다. 그곳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자신이 살던 고장의 이름마저 공식 문서에서 잃었다.
기록은 처벌을, 마을은 피를 기억했다
순흥에는 ‘피끝마을’이라는 이름이 남아 있다.
후대의 사찬 기록은 철기 수백 명이 순흥으로 들이닥쳐 마침 한곳에 모여 있던 사람들을 죽였고, 피가 죽계 물을 붉게 물들였다고 전한다. 그 핏물이 멈춘 곳이 피끝마을이 됐다는 이야기다.

당대 《세조실록》의 문장은 조금 다르다. 순흥부 혁파와 관아 파괴, 여섯 명의 참형과 가족의 강제 이속은 분명히 적혀 있다. 동시에 혐의가 애매한 백성 가운데 많은 사람의 생명을 보전했다고도 기록했다.
그러므로 순흥에서 정확히 몇 명이 죽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대규모 학살은 지역에 강하게 남은 역사 기억이지만, 그 규모가 당대 기록으로 직접 입증되는 것은 아니다.
두 기록 가운데 하나를 버릴 필요는 없다. 국가는 처벌의 행정 문서를 남겼다. 마을은 그 처벌이 남긴 공포를 지명과 이야기로 남겼다.
영월까지 닿은 파문
순흥 사건은 순흥에서 끝나지 않았다.
조정 대신들은 살아 있는 단종이 모든 복위운동의 구심점이라고 주장했다. 지난해에는 사육신이 단종을 내세웠고, 이제 금성대군도 단종을 끼고 군사를 일으키려 했다는 논리였다.
《세조실록》의 1457년 음력 10월 21일 기사에는 세조가 금성대군에게 사약을 내리라고 명한 뒤, 단종이 그 소식을 듣고 스스로 목매어 죽었다는 문장이 이어진다. 그러나 한양의 명령이 영월까지 당일 전달됐다고 보기는 어렵다. 서로 다른 시점에 벌어진 일을 한 기사에 묶어 적었거나, 전달 과정을 생략했을 가능성이 있다. 후대에는 음력 10월 24일을 단종의 승하일로 기려 왔다. 따라서 이 기록은 두 사건이 같은 날 동시에 벌어졌다는 뜻보다, 금성대군 사건 뒤 단종의 죽음이 이어졌다는 정치적 흐름을 보여주는 자료로 읽는 편이 타당하다.
단종이 실제로 순흥의 계획을 알았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그가 지시했다는 확실한 기록도 없다. 그러나 세조 정권에 중요한 것은 단종의 의사가 아니었다. 누군가가 그의 이름으로 다시 모일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살아 있는 이름 자체가 반역의 깃발이 될 수 있었다.
226년 뒤
순흥이라는 이름이 돌아온 것은 1683년이었다.
폐부된 지 226년 만이었다. 그러나 고을이 돌아왔다고 기억이 곧바로 공적인 것이 된 것은 아니다. 《순흥읍지》는 한 현감이 먼저 비밀리에 단을 쌓았다고 전한다. 여기서 단(壇)은 제사를 지낼 때 제물을 올리고 절할 수 있도록 돌이나 흙으로 만든 제단이다. 1693년에야 금성대군이 갇혀 있던 자리에 단이 공식적으로 마련됐고, 1719년 세 개의 단으로 고쳐졌다.
지금의 영주 금성대군 신단에는 돌로 만든 세 개의 단이 놓여 있다. 중앙 뒤쪽은 금성대군, 앞쪽 한 단은 이보흠, 나머지 한 단은 함께 죽은 이름 없는 사람들을 위한 자리다. 왕자의 이름과 수령의 이름은 기록에 남았지만, 마지막 단에는 개인의 이름 대신 ‘의민’이라는 집단의 이름만 남았다.

세조의 시대에는 역적이었던 사람들이 숙종·영조·정조의 시대를 지나며 충신이 됐다. 금성대군은 정민(貞愍)이라는 시호를 받았고, 단종에게 충성을 바친 종친과 신하들의 이름도 다시 국가의 의례 안으로 들어왔다. 단종이 왕의 이름을 되찾는 데 241년이 걸렸듯, 순흥도 오랜 시간 뒤에야 자기 이름과 제단을 되찾았다.
나라는 그들을 죽이고 고을을 없앴다. 그래도 순흥 사람들은 희생자들의 제사를 이어갔다. 처음에는 몰래 제단을 쌓았고, 뒤에는 세 개의 돌단을 남겼다.
금성대군과 단종복위운동에 대한 궁금증 정리
금성대군은 누구인가?
금성대군 이유는 세종과 소헌왕후의 여섯째 아들로 세조의 친동생이자 단종의 숙부다. 계유정난 뒤 세조와 대립했고, 순흥 유배 중 단종복위운동을 도모하다 1457년 사사됐다.
금성대군의 단종복위운동은 어떻게 발각됐나?
《세조실록》에 따르면 안동 관노 이동이 1457년 6월 27일 한양으로 올라가 모의를 고발하고, 금성대군에게 받은 명주 띠를 증거로 제출했다. 후대 기록에는 격문 초고를 훔쳤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순흥부는 왜 폐지됐나?
세조 정권은 순흥의 관리와 주민들이 금성대군의 복위 계획에 가담하거나 이를 막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순흥부를 폐지하고 관아를 허문 뒤 토지와 주민을 풍기·영천·봉화 등에 나누었다.
순흥에서 정말 대규모 학살이 있었나?
당대 실록은 여섯 명의 참형과 지역민·향리 가족에 대한 처벌을 기록하지만 대규모 학살의 정확한 숫자는 전하지 않는다. 죽계가 피로 붉어졌다는 이야기는 후대 기록과 피끝마을 지명 설화에 남아 있어, 당대 기록과 지역 기억을 구분해 볼 필요가 있다.
금성대군의 복위운동이 단종의 죽음에 영향을 줬나?
세조 정권의 대신들은 사육신 사건에 이어 금성대군 사건까지 일어나자 단종이 살아 있는 한 복위 시도가 반복된다고 주장했다. 이 사건은 단종을 죽여야 한다는 요구의 마지막 정치적 빌미가 됐지만, 단종이 직접 계획을 지시하거나 참여했다는 확실한 기록은 없다.
사료 노트
- 금성대군 이유(李瑜, 1426~1457): 세종의 여섯째 아들. 세조의 친동생이자 단종의 숙부
- 순흥 복위 모의 고발: 1457년 음력 6월 27일, 안동 관노 이동이 명주 띠를 증거로 제출 (《세조실록》)
- 순흥부 혁파: 1457년 음력 8월 2일, 토지·인민 이속과 관아·창고 파괴 승인 (《세조실록》)
- 금성대군 사사: 1457년 음력 10월 21일 기사에 명령 기록 (《세조실록》)
- 순흥부 복설: 1683년(숙종 9), 폐부 뒤 226년 만에 복구
- 금성대군 신단: 중앙 금성대군, 앞쪽 이보흠과 함께 희생된 사람들을 위한 세 단
- 피끝마을 전승: 후대 기록과 지역 설화에 전해지며, 학살 규모는 당대 실록에서 직접 확인되지 않음
이 글은 《세조실록》의 국문·처벌 기록과 조선 후기의 현창 기록이 서로 다른 정치적 조건에서 작성됐다는 점을 구분해 서술했다.
출처
본문 출처
[조선왕조실록 — 세조 원년 윤6월 11일, 금성대군 관련 기록](https://sillok.history.go.kr/id/kga_10106111_002)
[조선왕조실록 — 세조 3년 6월 27일, 관노 이동의 고발](https://sillok.history.go.kr/id/kga_10306027_001)
[조선왕조실록 — 세조 3년 8월 2일, 순흥부 혁파](https://sillok.history.go.kr/id/kga_10308002_004)
[조선왕조실록 — 세조 3년 10월 9일, 의금부 조사와 처벌](https://sillok.history.go.kr/id/kga_10310009_002)
[조선왕조실록 — 세조 3년 10월 21일, 금성대군 사사와 노산군 죽음](https://sillok.history.go.kr/id/kga_10310021_002)
[조선왕조실록 — 세조 3년 11월 29일, 옛 순흥 땅 분할](https://sillok.history.go.kr/id/kga_10311029_003)
[조선왕조실록 — 숙종 8년 1월 13일, 순흥 복설 논의](https://sillok.history.go.kr/id/wsa_10801013_002)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제1차 왕자의 난](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1385)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안평대군](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5085)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금성대군](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07853)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삭녕](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6159)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사창](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5991)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영주 금성대군 신단](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70976)
[국가유산포털 — 영주 금성대군 신단](https://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ccbaCpno=1333704910000&pageNo=1_1_2_0)
[우리역사넷 — 조선 왕릉과 백 리](https://contents.history.go.kr/mobile/eh/view.do?levelId=eh_r0290_0010)
[우리역사넷 — 단종 복위운동](https://contents.history.go.kr/front/hm/view.do?levelId=hm_074_0060)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순흥의 피화 전승](https://db.history.go.kr/id/sa_085r_0070_0080)
이미지 출처
본문 장면 삽화 9장은 Midjourney V7로 제작했으며, 1·2·3·4·6·9번은 손·얼굴·복식 등 필요한 부분만 국소 보정했다. 〈1457년 순흥 복위 계획〉 위치도와 〈세종의 아들들과 단종〉 가계도는 GPT 이미지 도구로 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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