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사

이스라엘 건국과 제1차 중동전쟁

(2) 2천 년의 약속, 이스라엘

이스라엘 건국과 제1차 중동전쟁 — (2) 2천 년의 약속, 이스라엘

프롤로그: 내전의 시작

유엔 총회가 분할 결의안을 통과시킨 다음 날, 팔레스타인은 내전으로 빠져들었다. 1947년 11월 30일 오전, 하이파 교외를 달리던 유대인 승객 버스 두 대가 아랍 총격을 받고 다섯 명이 죽었다. 그날 저녁 이르군은 하이파의 아랍 마을에 보복 공격을 감행했다. 종이 위의 분할 지도가 현실의 총성으로 바뀌기까지 걸린 시간은 정확히 하루였다.

버스 습격 전날 벤구리온은 분할안 통과를 기뻐하는 군중 속에서 혼자 애도했다. 무슨 일이 올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1장: 피로 얼룩진 건국 전야

이후 6개월을 역사는 “위임통치기 팔레스타인 내전”이라 부르지만, 현장에서 그것은 그냥 전쟁이었다. 영국의 위임통치는 1948년 5월 14일 자정에 공식 종료될 예정이었다. 그 날짜까지 영국은 명목상 팔레스타인의 통치자였지만 실질적으로는 어느 쪽도 통제하지 않은 채 철수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 공백 속에서 하가나와 아랍 민병대가 마을과 도로와 언덕을 두고 매일 싸웠다.

아랍 연맹이 편성한 아랍 해방군(Arab Liberation Army)은 시리아, 이라크 등지에서 온 자원병으로 구성됐고, 유대인 정착촌을 연결하는 도로망을 차단하며 각 정착촌을 고립시키려 했다. 하가나는 방어와 공세를 병행했다. 내전 초기에는 도로 통제권을 두고 매복과 기습이 반복됐지만, 1948년 3월 이후 하가나는 달레트 계획(Plan Dalet)이라는 이름의 광범위한 작전에 돌입했다. 흩어진 유대인 정착촌들을 서로 연결하는 보급로를 확보하고, 그 경로를 위협하는 아랍 거점들을 무력화하는 것이 목표였다.

달레트 계획(Plan Dalet)1948년 3월 하가나가 수립한 군사 작전 계획. ‘달레트’는 히브리어 알파벳 네 번째 글자로, 앞서 수립된 알레프·베트·기멜(Aleph·Bet·Gimel) 계획들의 연장선이었다. 초기 계획들이 방어 중심이었다면 달레트는 처음으로 본격적인 공세 작전을 포함했다. 유대국으로 배정된 영토 안의 아랍 마을과 도로 요충지를 점령·무력화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 계획이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에 대한 추방 목적이었는지, 아니면 전쟁 목적의 군사 작전이었는지는 오늘날까지 역사학자들 사이에서 논쟁 중이다.

1948년 4월 9일, 이르군과 레히 연합 병력이 예루살렘 서쪽 아랍 마을 데이르 야신(Deir Yassin)을 공격해 주민 100여 명을 학살했다. 군사 작전이었는지 민간인 학살이었는지는 지금도 논쟁이 이어지지만, 그 여파는 논쟁의 여지가 없었다. 소문이 팔레스타인 전역에 퍼지면서 공포에 질린 아랍 마을 주민들이 짐을 싸기 시작했다.

하이파에서 쫓겨나는 팔레스타인 아랍 주민들, 1948년 4월
1948년 4월 하이파에서 하가나 병사들에게 쫓겨나는 팔레스타인 아랍 주민들의 흑백 사진.
1948년 4월, 하가나 병사들에 의해 하이파에서 쫓겨나는 팔레스타인 아랍 주민들. 하이파 함락 후 수만 명이 이 도시를 등졌다. ⓒ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4월 말 하이파가, 5월 초 야파가 하가나에게 넘어갔다. 팔레스타인에서 가장 큰 아랍 도시 두 곳이 공식적인 전쟁이 시작되기도 전에 이미 함락됐다. 아랍 측의 전선은 내전 단계에서부터 무너지고 있었다.

하이파와 야파(Haifa & Jaffa)위임통치기 팔레스타인의 양대 항구 도시. 하이파는 북부 해안의 산업·항만 거점, 야파는 텔아비브 남쪽에 인접한 아랍계 인구 중심지였다. 1948년 4월 22일 하이파, 5월 13일 야파가 차례로 하가나에게 함락되면서 분할안이 아랍 측에 배정한 두 핵심 도시가 모두 유대 측 손에 들어갔다.

제2장: 선언하는가, 기다리는가

전쟁이 6개월째 이어지는 동안, 유대인 지도부는 한 가지 결단 앞에서 망설이고 있었다. 과연 지금 건국을 선언해야 하는가.

5월 12일, 텔아비브에 워싱턴발 전보가 도착했다. 발신자는 미 국무장관 조지 마셜(George C. Marshall)이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기획한 전략가이자 유럽 재건을 이끈 마셜 플랜의 설계자. 그의 메시지는 단호했다. 지금 선언하면 아랍 국가들이 전면 침공할 것이고, 이스라엘은 버텨낼 수 없을 것이다. CIA도 같은 판단을 내리고 있었다.

조지 마셜(George C. Marshall)제2차 세계대전 미 육군 참모총장으로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기획했다. 트루먼 행정부 국무장관 재임 중 유럽 부흥을 위한 마셜 플랜을 설계했으며,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이스라엘 독립 선언에 강하게 반대했으나 트루먼이 승인을 결정하자 이의를 제기하지는 않았다.

반대 논거는 설득력이 있었다. 영국은 떠나면서 무기를 아랍 측에 넘겼다. 아랍 연합군에는 야포와 장갑차와 전투기가 있었다. 이스라엘에는 없었다. 선언하는 순간 팔레스타인 내전은 국가 간 전쟁으로 전환된다. 그 전쟁에서 지면, 이스라엘은 시작도 하기 전에 끝난다.

유대인 임시 민족위원회는 5월 12일 표결을 실시했다. 선언에 찬성한 표가 반대를 앞섰다. 벤구리온의 생각도 마찬가지였다. 선언하지 않아도 아랍 국가들은 침공할 것이다. 기다린다고 무기가 생기지 않는다. 선언 없이 기다리면 방어의 명분만 잃는다.

워싱턴에서는 트루먼 대통령이 국무부와 다른 의견을 갖고 있었다. 국무부가 반대해도 트루먼의 입장은 확고했다. 이스라엘이 선언하는 순간, 트루먼의 승인이 곧바로 전달될 것이었다. 그러나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극소수였다. 텔아비브에서 선언문을 쓰는 사람들은 승인이 올지 알지 못한 채 5월 14일을 준비했다.

선언문을 쓰는 사람들, 텔아비브 1948년 5월
1948년 5월 텔아비브에서 늦은 밤 책상에 둘러앉아 이스라엘 독립 선언문 초안을 작성하는 사람들의 모습.
5월 14일을 며칠 앞둔 텔아비브의 한 사무실. 선언문을 쓰는 이들은 미국이 승인을 보낼지 알지 못한 채 한 줄 한 줄을 다듬었다.
해리 S. 트루먼(Harry S. Truman)미국 제33대 대통령(재임 1945~1953). 국무부와 합참의 강한 반대에도 이스라엘 건국 선언 11분 만에 사실상의 승인을 발표했다. 그의 결단에는 세 가지 요인이 작동했다. 첫째, 침례교 신자였던 그는 성경의 약속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둘째, 캔자스시티 시절 동업자였던 유대인 친구 에디 제이콥슨(Eddie Jacobson)이 시오니즘 지지를 끈질기게 호소했다. 셋째, 1948년 11월 대선을 앞둔 시점에서 유대계 미국인의 지지가 절실했다. 트루먼은 훗날 “내가 키루스(Cyrus, 유대인을 자기 땅으로 돌려보낸 고대 페르시아 왕)다”라고 말했다.

제3장: 이스라엘의 건국이 선언되다

벤구리온과 유대인 임시 정부는 텔아비브 로스차일드 거리의 작고 수수한 2층 건물을 선언 장소로 선택했다. 넓고 상징적인 하비마 극장 대신 이 비좁은 미술관을 택한 이유는 하나였다. 이집트 공군의 폭격 표적이 될 확률이 낮았기 때문이다. 건국을 선언하기 위한 자리의 초청장은 행사 전날 저녁에야 극소수에게 비밀리에 배포됐다. 200여 명이 빽빽이 들어찬 공간에서, 유대 민족의 역사상 가장 중요한 순간이 준비되고 있었다.

텔아비브 로스차일드 거리 16번지 독립 기념관, 현재
텔아비브 로스차일드 거리에 있는 베이지색 바우하우스 양식 2층 건물 독립 기념관의 현재 외관 사진.
1948년 그날의 그 건물. 로스차일드 거리 16번지의 디젠고프 하우스는 지금도 독립 기념관(Beit Ha’atzmaut)이라는 이름으로 보존되고 있다. 외관은 1930년대 바우하우스 양식 리노베이션 이후 형태 그대로다. ⓒ Suicasmo / Wikimedia Commons (CC BY-SA 4.0)

선언 시각은 원래 영국 위임통치 종료 시점인 자정이었다. 그러나 유대교 안식일이 시작되는 금요일 저녁을 피해야 했기 때문에, 위임통치 공식 종료 8시간 전인 오후 4시로 앞당겨졌다. 1948년 5월 14일 오후 4시.

선언문을 확정하는 과정에서도 막판까지 격렬한 논쟁이 이어졌다. 쟁점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종교였다. 마이몬 랍비를 비롯한 종교계 인사들은 선언문에 반드시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명시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이를 거부하면 서명을 거부하겠다고 압박했다. 세속주의자들은 결사 반대했다. 다른 하나는 국경이었다. 누군가 유엔 분할안의 경계를 선언문에 명시하자고 제안하자 벤구리온이 일축했다. 아랍이 거부한 분할안의 국경선에 왜 우리 스스로를 얽매어야 하는가.” 표결 끝에 국경 명시는 삭제됐다. 종교 문제는 “이스라엘의 반석(Tzur Yisrael)”이라는 표현으로 타협했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에게는 하느님으로,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민족과 국가의 힘으로 읽힐 수 있는 중의적 표현이었다.

이스라엘의 반석(Tzur Yisrael)독립 선언문 마지막 문단에 들어간 히브리어 표현. 유대 전통에서는 신을 지칭하는 시적 호칭이지만, 세속적 맥락에서는 국가의 강인함이나 민족적 의지로도 읽힌다. 종교계와 세속주의자 양쪽이 각자 원하는 의미로 수용할 수 있었던 이 표현 덕분에 신생국은 출발점에서 분열을 피할 수 있었다.
이스라엘 독립 선언 장면, 1948년 5월 14일
연단에서 선언문을 낭독하는 벤구리온 뒤로 헤르츨 초상화가 걸려 있는 1948년 독립 선언 흑백 사진.
1948년 5월 14일 오후 4시, 텔아비브 미술관. 벤구리온 뒤로 테오도르 헤르츨의 초상이 걸려 있다. 오케스트라가 반주를 시작하기도 전에 참석자들이 먼저 하티크바를 합창했다. ⓒ Rudi Weissenstein / Government Press Office (CC BY-SA 3.0)

오후 4시, 벤구리온의 낭독이 시작됐다. “이스라엘 국가의 수립을 선언합니다.” 참석자들이 일어나 하티크바(Hatikvah)를 합창했다. 오케스트라가 반주를 시작하기도 전에 사람들의 노래가 식장을 가득 메웠다. 이스라엘 국가기록원 자료에 따르면, 벤구리온이 낭독한 것은 완성된 두루마리가 아니라 등사본 인쇄물이었다. 나라가 태어나는 순간도 즉흥의 연속이었다.

하티크바를 합창하는 군중, 텔아비브 미술관 1948년
1948년 텔아비브 미술관에서 사람들이 일어서서 하티크바를 합창하는 극적인 순간.
오케스트라가 반주를 시작하기도 전에 사람들이 먼저 일어나 노래를 불렀다. 2천 년 디아스포라의 설움이 이 순간 끝났다.
하티크바(Hatikvah)“희망”을 뜻하는 히브리어. 19세기 말 시인 나프탈리 헤르츠 임베르가 쓴 시에서 비롯된 시오니즘 운동의 국가(國歌). 2천 년의 디아스포라 끝에 시온으로 돌아가겠다는 열망을 담고 있으며, 독립 후 이스라엘 국가(國家)의 국가(國歌)로 채택됐다.
독립 선언 직후 텔아비브 로스차일드 거리, 1948년 5월 14일
1948년 5월 14일 밤, 텔아비브 로스차일드 거리에서 수천 명이 이스라엘 독립을 축하하며 환호하는 장면.
선언이 끝나자 텔아비브 전체가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서로 껴안고, 울고, 춤췄다. 그날 밤 이집트 공군이 이 도시를 폭격했다.

선언이 끝나자 트루먼 대통령의 승인이 11분 만에 도착했다. 그날 밤, 이집트 공군이 텔아비브를 폭격했다. 그리고 벤구리온은 일기에 이렇게 썼다. “국민들은 환호하고 있다. 그러나 11월 29일 때처럼, 나는 이 기쁨 속에서 다시 한번 애도한다. 나는 즉시 군 본부로 복귀했다.


제4장: 다섯 군대가 쏟아졌다

제1차 중동전쟁의 시작

5월 15일 새벽, 영국의 위임통치 종료와 동시에 이집트, 트란스요르단, 시리아, 이라크, 레바논 5개국 군대가 일제히 이스라엘 국경을 넘었다. 팔레스타인 내전이 공식적인 국가 간 전면전, 제1차 중동전쟁(1948 Arab-Israeli War)으로 전환되는 순간이었다.

1948년 5월 15일, 5개국 동시 침공
1948년 5월 15일 5개국 아랍 연합군의 동시 침공 경로와 전력 비교를 나타낸 인포그래픽 지도.
1948년 5월 15일 새벽, 이집트·트란스요르단·시리아·이라크·레바논 5개국 아랍 연합군이 동시에 이스라엘을 향해 진격을 시작했다.

숫자만 놓고 보면 결과는 정해진 것처럼 보였다. 아랍 연합군은 영국과 프랑스제 야포, 장갑차, 이집트의 스핏파이어 전투기를 보유한 정규군이었다. 반면 이스라엘에는 1948년 5월 중순까지 야포가 단 한 문도 없었다. 전차는 한 대도 없었고, 전투기도 없었다. 방어선은 상업용 트럭에 철판을 두른 즉석 장갑차에 의존했다. 다만 총병력 비교에서는 상황이 다르다. 여러 연구는 당시 이스라엘 측 전력을 2만5천~6만5천 명으로 넓게 추산하는 반면, 아랍 연합군 침공 초기 병력은 2만1천~2만3천 명 선으로 본다. 절대적 수적 열세는 아니었다. 체감 위기는 숫자보다 질적 격차에서 나왔다. 아랍 연합군 쪽에는 영국 장교단이 훈련한 정예 요르단 아랍 군단이 있었고, 이스라엘에는 흔한 중화기도 없었다.

예루살렘 전투의 요르단 아랍 군단, 1948년
1948년 예루살렘 인근에서 야포를 조작하는 요르단 아랍 군단 병사들의 흑백 사진.
1948년, 예루살렘 주변 전투에서 25파운드 야포를 발사하는 요르단 아랍 군단. 영국 장교단이 훈련한 아랍 연합군 중 가장 전투력 높은 부대였다. ⓒ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이집트군은 가자 방면에서 해안선을 따라 북상하며 텔아비브를 향했다. 5월 말, 선두 부대는 텔아비브 남쪽 30킬로미터까지 접근했다. 요르단의 아랍 군단은 예루살렘을 공격해 5월 28일 구시가지 유대인 구역을 함락시켰다. 수백 년 된 유대교 회당들이 사흘 만에 잿더미가 됐다.

이집트군의 북상과 예루살렘 공격
1948년 5월 이집트군의 해안 북상 경로와 요르단 아랍 군단의 예루살렘 공격, 함락된 유대교 회당 사진을 담은 인포그래픽.
이집트군은 해안선을 따라 텔아비브 남쪽 30킬로미터까지 접근했고, 요르단 아랍 군단은 5월 28일 예루살렘 구시가지 유대인 구역을 함락시켰다.

수세의 이스라엘, 라트룬 함락

아랍 군단은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는 간선도로의 요충지 라트룬(Latrun)까지 장악했다. 서예루살렘에 갇힌 유대인 10만 명을 향한 식량과 물의 보급이 완전히 끊겼다. 시리아군은 북부 갈릴리의 유대인 정착촌들을 압박했다.

아랍 군단(Arab Legion)트란스요르단(요르단)의 정예 지상군. 영국군 장교 글럽 파샤(John Bagot Glubb)의 지휘 아래 훈련된 아랍 연합군 가운데 가장 정규군에 가까운 부대였다. 예루살렘 구시가지 유대인 구역 함락과 라트룬 장악은 이 부대의 전과였다.

이스라엘의 라트룬 돌파 시도는 두 차례 이어졌다. 5월 25일의 빈눈 알레프 작전(Operation Bin Nun Aleph)과 5월 30일의 빈눈 베트 작전(Operation Bin Nun Bet). 두 번 모두 막대한 손실을 내고 물러났다. 이 전투에는 유럽에서 홀로코스트를 생존하고 팔레스타인에 도착한 지 며칠 되지 않은 이민자들이 다수 투입됐다. 히브리어를 몰랐고, 총을 제대로 잡아본 적도 없었다.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이들이 낯선 땅의 전선으로 그대로 밀려들어갔다. 라트룬은 끝내 뚫리지 않았고, 예루살렘은 그대로 굶어가고 있었다.

라트룬 전투 이후 후퇴하는 이스라엘 병사들, 1948년 5월
1948년 5월 라트룬 공격 실패 후 바위투성이 언덕을 후퇴하는 이스라엘 병사들의 모습.
라트룬을 두 차례 공격했지만 두 번 모두 실패했다. 투입된 병사 중 다수는 유럽의 수용소에서 막 살아 돌아온 사람들이었다.

제5장: 체코슬로바키아로부터의 구원

발락 작전

이스라엘을 구원한 것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왔다. 체코슬로바키아였다.

미국은 1947년 12월부터 팔레스타인 양측에 무기 금수 조치를 시행하고 있었고, 영국은 시오니스트 무장 조직에 무기를 팔지 않았다. 소련은 중동에서 영국의 영향력을 약화시키려 했고, 소련 영향력에 속해 있던 체코슬로바키아 정부는 이스라엘의 무기 구매 요청을 수락했다. 이스라엘 요원들은 체코슬로바키아 자테츠(Žatec) 기지를 중간 거점으로 삼고 야간에 무기를 공수했다. 이것이 발락 작전(Operation Balak)이었다.

발락 작전(Operation Balak)1948년 이스라엘이 체코슬로바키아에서 무기를 공수한 비밀 작전. 제2차 세계대전 미군 출신 알 슈위머(Al Schwimmer) 등 유대계 자원 조종사들이 폐기 직전의 수송기를 구해 체코슬로바키아와 이스라엘 에크론 기지를 오갔다. 소총과 탄약뿐 아니라 전투기까지 이 경로로 들어왔다.
유엔 결의 50호와 영국의 이중 행보1948년 5월 29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결의 50호를 채택해 양측 모두에 4주 휴전과 무기 금수를 명령했다. 미국은 1947년 12월부터 자국발 금수를 시행하고 있었다. 그런데 영국은 위임통치는 끝났지만 요르단·이라크·이집트와의 정식 동맹 조약 의무에 따라 아랍 동맹국에 무기 공급을 계속했다. 특히 요르단의 아랍 군단은 영국 장교 글럽 파샤가 직접 지휘했고, 장교진 다수가 영국군 출신이었다. 외무장관 어니스트 베빈(Ernest Bevin)의 친아랍·반시오니즘 노선과 수에즈 운하·중동 송유관·석유 이권 보호라는 전략적 고려가 결합한 결과였다. 결의 50호는 양측에 동일하게 적용됐지만, 체코슬로바키아의 대(對)이스라엘 무기 공급은 묵인됐고 영국의 대(對)아랍 공급은 조약 의무로 정당화됐다. 법은 평등했으나 위반의 규모는 한쪽에 압도적으로 유리했다.

체코에서 들어온 것 가운데 가장 결정적인 것은 아비아 S-199 전투기였다. 나치 독일의 메세르슈미트 Bf 109 설계를 바탕으로 체코가 조립한 기종으로, 조종이 까다롭고 사격 체계에 결함이 있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것저것 가릴 처지가 못 됐다. 25대가 분해된 채 밤하늘을 건너와 현지에서 조립됐다.

이스라엘 공군 아비아 S-199 전투기
이스라엘 공군 다윗의 별 마크가 그려진 아비아 S-199 전투기의 지상 사진.
1948년 이스라엘 공군의 아비아 S-199. 체코슬로바키아에서 분해된 채 공수된 이 전투기들이 이스라엘의 첫 번째 전투기였다. ⓒ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아드 할롬 공습

5월 29일, 이집트군 장갑차 행렬이 텔아비브 남쪽 30킬로미터 지점 아드 할롬(Ad Halom) 다리를 돌파하려 하고 있었다. 이집트군이 다리를 넘으면 평지가 펼쳐졌고, 텔아비브까지 막을 것이 없었다. 이때 갓 조립을 마친 S-199 전투기 4대가 출격했다. 제2차 세계대전 미 해병대 출신 자원병 루 레나트(Lou Lenart), 훗날 이스라엘 대통령이 되는 에제르 와이즈만(Ezer Weizman), 에디 코헨(Edie Cohen), 모디 알론(Modi Alon)이 이집트 차량 행렬을 향해 급강하하며 70킬로그램짜리 폭탄을 투하했다. 에디 코헨은 대공포에 격추돼 전사했다. 이집트군의 물리적 피해는 미미했다.

아드 할롬 상공 출격, 1948년 5월 29일
1948년 5월 아드 할롬 상공에서 이집트 차량 행렬을 향해 급강하하는 프로펠러 전투기들의 모습.
1948년 5월 29일, 이스라엘 최초의 전투 출격. 전투기 4대가 텔아비브를 향해 진격하던 이집트 차량 행렬 위로 급강하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 전투기가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이집트군에게는 예상 밖의 사태였다. 진격을 멈춘 이집트군은 그 자리에 참호를 팠다.

루 레나트(Lou Lenart)제2차 세계대전 미 해병대 출신 유대계 조종사로 아드 할롬 출격의 편대장이었다. 훗날 그는 “우리가 막지 못했다면 텔아비브는 함락됐을 것”이라고 회고했다. 2015년 이스라엘에서 97세로 사망했다.
에제르 와이즈만(Ezer Weizman)1924년 텔아비브 출생.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 공군(RAF)에서 복무했으며 아드 할롬 첫 출격에 참여했다. 이후 이스라엘 공군 총사령관(1958~1966)을 지냈고, 1993년 이스라엘 제7대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2005년 사망.
에디 코헨(Eddie Cohen)남아프리카 공화국 출신 유대계 조종사. 아드 할롬 출격에 참여했다가 이집트 대공포에 격추돼 전사했다. 이스라엘 공군 최초의 전사자 중 한 명이다.
모디 알론(Modi Alon)1921년 팔레스타인 태생. 제2차 세계대전 당시 RAF에서 복무하고 아드 할롬 출격에 참여했다. 이후 이스라엘 최초의 에이스 조종사로 기록됐으나, 1948년 10월 훈련 비행 중 사고로 사망했다.

제6장: 예루살렘을 살린 산길

마커스의 아이디어

전투기가 남쪽을 막는 동안, 예루살렘은 굶어 죽어가고 있었다.

라트룬을 장악한 아랍 군단이 간선도로를 봉쇄한 지 2주가 넘었다. 서예루살렘 유대인 10만 명에게 식수가 떨어지고 있었다. 하가나의 라트룬 정면 돌파 시도는 두 차례 모두 실패했다. 벤구리온이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은 이 시점이었다.

데이비드 “미키” 마커스(David “Mickey” Marcus). 미 육군사관학교 웨스트포인트 졸업생이자 제2차 세계대전 참전 대령. 유대계 미국인인 그는 벤구리온의 요청으로 이스라엘에 왔고, 이스라엘 최초의 알루프(Aluf, 준장)로 임명됐다. 그의 판단은 단순했다. 정면을 뚫지 못한다면 돌아가면 된다. 라트룬 서쪽의 험준한 바위 산을 가로지르는 비포장 산길을 보급로로 개척하는 것이 그가 세운 계획이었다. 그의 이야기는 1966년 커크 더글러스 주연 영화 《캐스트 어 자이언트 섀도우(Cast a Giant Shadow)》로 만들어졌다.

마커스의 산길 개척 계획에 따라 팔마흐 공병대(하가나 정예 돌격대 팔마흐 소속 공병 부대로, 도로 개설·교량 공사 등 야전 공병 임무를 맡았다)와 민간 자원봉사자 수백 명이 투입됐다. 지프도 전복될 만큼 가파른 절벽 구간에서는 40~50대 자원봉사자들이 20킬로그램짜리 식량 자루와 탄약을 등에 지고 산을 넘었다. 13킬로미터짜리 비포장 산길이 완성되기까지 열흘이 걸렸고, 6월 10일 밤 첫 번째 보급 트럭이 산길을 넘어 예루살렘으로 들어왔다. 제1차 휴전 발효 하루 전이었다.

버마 로드 개척

버마 로드를 오르는 보급 차량, 1948년 6월 14일
1948년 6월 버마 로드에서 불도저가 트럭을 견인하는 흑백 사진.
1948년 6월 14일, 불도저가 트럭을 끌어올리는 버마 로드. 도로가 열린 지 나흘 만에 보급 차량이 예루살렘으로 이어지기 시작했다. ⓒ Hans Pinn /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버마 로드를 넘는 자원봉사자들
험준한 석회암 바위 사이로 짐을 등에 지고 오르는 사람들의 모습.
도로가 완공되기 전, 자원봉사자들은 험준한 바위 산을 짐을 지고 직접 걸어 넘었다. 말도, 사람도, 무너질 것 같은 절벽 길을 함께 올랐다.

포위가 풀렸다.

버마 로드(Burma Road)라트룬 봉쇄를 우회해 서예루살렘에 보급품을 전달하기 위해 개척된 13킬로미터 비포장 산길. 제2차 세계대전 중국-버마 국경의 보급로에서 이름을 빌렸다. 이스라엘 건국 신화에서 민간 자원봉사자들의 희생을 상징하는 장면으로 기억된다.
버마 로드 — 봉쇄된 도시를 살린 13km의 생명선
버마 로드의 노선·건설 과정·주요 보급품·기여자를 정리한 인포그래픽.
라트룬 봉쇄를 우회해 텔아비브-예루살렘 사이의 험준한 산을 가로지른 13km의 비포장 생명선. 군인과 학생, 4·50대 자원봉사자 수백 명이 함께 만들었다.

그러나 마커스 대령은 이 길이 열린 다음 날 새벽 숙소 밖으로 나갔다가 아군 초병에게 사살됐다. 침낭을 두른 채 어둠 속에서 다가오는 그를 18세 초병이 침투자로 오인했다. 마커스는 히브리어를 몰라 영어로 “친구다”라고 외쳤지만 그것이 오히려 의심을 샀다. 이스라엘 건국 최초의 준장은 버마 로드가 열린 지 24시간도 지나지 않아 아군 총탄으로 세상을 떠났다.


에필로그: 이스라엘의 승리 — 그리고 사라진 사람들

1948년 6월 11일, 유엔 중재로 4주간의 제1차 휴전이 발효됐다.

개전 초기 이스라엘을 밀어붙이고 있던 아랍 연합군에게 이 휴전은 치명적인 오판이었다. 이스라엘에게 그것은 국가의 운명을 바꿀 시간이었다. 체코슬로바키아에서 대포, 장갑차, 탄약이 대량으로 들어왔다. 벤구리온은 하가나, 팔마흐, 이르군 등 각기 다른 지휘권 아래 있던 무장 조직들을 해체하고 단일 지휘 체계의 이스라엘 방위군(IDF)으로 통합했다. 해외에서 온 자원 참전 병사들 — 마할(Machal) — 은 제2차 세계대전 실전 경험을 가진 베테랑들이었고, 신생 군대의 전투 역량을 단기간에 끌어올렸다.

마할(Machal)‘해외 자원봉사자’를 뜻하는 히브리어 약자. 미국, 영국, 남아프리카, 캐나다 등지에서 온 제2차 세계대전 참전 유대계 병사들이 이스라엘 건국 전쟁에 합류했다. 아드 할롬 출격의 루 레나트, 예루살렘 전선의 마커스 대령도 이들이었다.

7월 9일 전투가 재개됐을 때, 이스라엘군은 4주 전의 이스라엘군이 아니었다. 중화기와 전투기를 갖춘 이스라엘은 7월 공세에서 리다(Lydda)와 람레(Ramle)를 점령하고 네게브 전선에서 이집트군을 밀어냈다. 7월 18일 2차 휴전이 발효됐지만, 이스라엘은 멈추지 않았다. 10월에는 요아브 작전(Operation Yoav)으로 네게브를 완전히 장악하며 이집트군 주력을 포위했고, 갈릴리에서는 히람 작전(Operation Hiram)으로 아랍 해방군을 사흘 만에 격파하고 북부 전선을 마무리했다.

요아브 작전·히람 작전, 1948년 10월
1948년 10월 이스라엘이 감행한 요아브 작전과 히람 작전의 경로·전과·교전국을 정리한 인포그래픽.
1948년 10월 요아브 작전과 히람 작전. 네게브에서 이집트군을 포위하고, 갈릴리에서 아랍 해방군을 60시간 만에 격파했다. 이 두 작전 이후 전황은 사실상 이스라엘의 압도로 굳어졌다.
요아브 작전·히람 작전(Operation Yoav·Hiram)1948년 10월 이스라엘이 감행한 두 개의 대규모 공세. 요아브는 네게브 사막 일대의 이집트군을 포위·격파하기 위한 작전으로, 이스라엘이 네게브 전체를 장악하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히람은 갈릴리의 아랍 해방군과 시리아·레바논 연계 병력을 상대로 한 북부 작전으로, 60시간 만에 완료됐다. 이 두 작전 이후 전황은 사실상 이스라엘의 압도로 굳어졌다.

1949년 2월 이집트를 시작으로 레바논(3월), 요르단(4월), 시리아(7월)와 정전 협정이 차례로 체결됐다. 이라크는 끝내 협정에 서명하지 않은 채 군대만 철수시켰다. 그러나 5개국의 군사적 행동은 모두 멈췄다. 1948년 5월 15일 시작된 전쟁이 14개월 만에 막을 내렸다. 이스라엘은 유엔 분할안이 배정한 56%가 아니라 팔레스타인 전체의 약 78%를 손에 쥔 채로 승전했다.

이라크의 미서명1949년 로도스 협상에서 이집트·레바논·요르단·시리아 4개국은 차례로 이스라엘과 정전 협정에 서명했지만, 이라크는 끝내 서명을 거부했다. 이라크군은 1949년 3월 자국으로 철수했지만 적대 상태 종료를 공식화하는 어떤 문서에도 동의하지 않았다. 이라크와 이스라엘은 기술적으로 오늘날까지 평화 협정이 없는 상태이며, 양국 사이에는 외교 관계가 수립된 적이 한 번도 없다.

그 전쟁 동안 팔레스타인 아랍인 70만 명이 사라졌다. 어디로, 어떻게 사라졌을까.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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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미디어 공용(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및 CC BY 라이선스. 라이선스 표기는 각 사진 캡션 참조.

생성형 이미지: 별도 표기된 이미지는 Midjourney 또는 ChatGPT로 제작했다.

본문 출처

이스라엘 국가기록원

미 국무부 역사국(Office of the Historian)

트루먼 도서관 외교 문서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Journal of Palestine Studies

미 국무부 외교문서(FRUS)

Series

이스라엘 건국과 제1차 중동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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