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내전의 시작
유엔 총회가 분할 결의안을 통과시킨 다음 날, 팔레스타인은 내전으로 빠져들었다. 1947년 11월 30일 오전, 하이파 교외를 달리던 유대인 승객 버스 두 대가 아랍 총격을 받고 다섯 명이 죽었다. 그날 저녁 이르군은 하이파의 아랍 마을에 보복 공격을 감행했다. 종이 위의 분할 지도가 현실의 총성으로 바뀌기까지 걸린 시간은 정확히 하루였다.
버스 습격 전날 벤구리온은 분할안 통과를 기뻐하는 군중 속에서 혼자 애도했다. 무슨 일이 올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1장: 피로 얼룩진 건국 전야
이후 6개월을 역사는 “위임통치기 팔레스타인 내전”이라 부르지만, 현장에서 그것은 그냥 전쟁이었다. 영국의 위임통치는 1948년 5월 14일 자정에 공식 종료될 예정이었다. 그 날짜까지 영국은 명목상 팔레스타인의 통치자였지만 실질적으로는 어느 쪽도 통제하지 않은 채 철수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 공백 속에서 하가나와 아랍 민병대가 마을과 도로와 언덕을 두고 매일 싸웠다.
아랍 연맹이 편성한 아랍 해방군(Arab Liberation Army)은 시리아, 이라크 등지에서 온 자원병으로 구성됐고, 유대인 정착촌을 연결하는 도로망을 차단하며 각 정착촌을 고립시키려 했다. 하가나는 방어와 공세를 병행했다. 내전 초기에는 도로 통제권을 두고 매복과 기습이 반복됐지만, 1948년 3월 이후 하가나는 달레트 계획(Plan Dalet)이라는 이름의 광범위한 작전에 돌입했다. 흩어진 유대인 정착촌들을 서로 연결하는 보급로를 확보하고, 그 경로를 위협하는 아랍 거점들을 무력화하는 것이 목표였다.
1948년 4월 9일, 이르군과 레히 연합 병력이 예루살렘 서쪽 아랍 마을 데이르 야신(Deir Yassin)을 공격해 주민 100여 명을 학살했다. 군사 작전이었는지 민간인 학살이었는지는 지금도 논쟁이 이어지지만, 그 여파는 논쟁의 여지가 없었다. 소문이 팔레스타인 전역에 퍼지면서 공포에 질린 아랍 마을 주민들이 짐을 싸기 시작했다.

4월 말 하이파가, 5월 초 야파가 하가나에게 넘어갔다. 팔레스타인에서 가장 큰 아랍 도시 두 곳이 공식적인 전쟁이 시작되기도 전에 이미 함락됐다. 아랍 측의 전선은 내전 단계에서부터 무너지고 있었다.
제2장: 선언하는가, 기다리는가
전쟁이 6개월째 이어지는 동안, 유대인 지도부는 한 가지 결단 앞에서 망설이고 있었다. 과연 지금 건국을 선언해야 하는가.
5월 12일, 텔아비브에 워싱턴발 전보가 도착했다. 발신자는 미 국무장관 조지 마셜(George C. Marshall)이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기획한 전략가이자 유럽 재건을 이끈 마셜 플랜의 설계자. 그의 메시지는 단호했다. 지금 선언하면 아랍 국가들이 전면 침공할 것이고, 이스라엘은 버텨낼 수 없을 것이다. CIA도 같은 판단을 내리고 있었다.
반대 논거는 설득력이 있었다. 영국은 떠나면서 무기를 아랍 측에 넘겼다. 아랍 연합군에는 야포와 장갑차와 전투기가 있었다. 이스라엘에는 없었다. 선언하는 순간 팔레스타인 내전은 국가 간 전쟁으로 전환된다. 그 전쟁에서 지면, 이스라엘은 시작도 하기 전에 끝난다.
유대인 임시 민족위원회는 5월 12일 표결을 실시했다. 선언에 찬성한 표가 반대를 앞섰다. 벤구리온의 생각도 마찬가지였다. 선언하지 않아도 아랍 국가들은 침공할 것이다. 기다린다고 무기가 생기지 않는다. 선언 없이 기다리면 방어의 명분만 잃는다.
워싱턴에서는 트루먼 대통령이 국무부와 다른 의견을 갖고 있었다. 국무부가 반대해도 트루먼의 입장은 확고했다. 이스라엘이 선언하는 순간, 트루먼의 승인이 곧바로 전달될 것이었다. 그러나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극소수였다. 텔아비브에서 선언문을 쓰는 사람들은 승인이 올지 알지 못한 채 5월 14일을 준비했다.

제3장: 이스라엘의 건국이 선언되다
벤구리온과 유대인 임시 정부는 텔아비브 로스차일드 거리의 작고 수수한 2층 건물을 선언 장소로 선택했다. 넓고 상징적인 하비마 극장 대신 이 비좁은 미술관을 택한 이유는 하나였다. 이집트 공군의 폭격 표적이 될 확률이 낮았기 때문이다. 건국을 선언하기 위한 자리의 초청장은 행사 전날 저녁에야 극소수에게 비밀리에 배포됐다. 200여 명이 빽빽이 들어찬 공간에서, 유대 민족의 역사상 가장 중요한 순간이 준비되고 있었다.

선언 시각은 원래 영국 위임통치 종료 시점인 자정이었다. 그러나 유대교 안식일이 시작되는 금요일 저녁을 피해야 했기 때문에, 위임통치 공식 종료 8시간 전인 오후 4시로 앞당겨졌다. 1948년 5월 14일 오후 4시.
선언문을 확정하는 과정에서도 막판까지 격렬한 논쟁이 이어졌다. 쟁점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종교였다. 마이몬 랍비를 비롯한 종교계 인사들은 선언문에 반드시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명시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이를 거부하면 서명을 거부하겠다고 압박했다. 세속주의자들은 결사 반대했다. 다른 하나는 국경이었다. 누군가 유엔 분할안의 경계를 선언문에 명시하자고 제안하자 벤구리온이 일축했다. “아랍이 거부한 분할안의 국경선에 왜 우리 스스로를 얽매어야 하는가.” 표결 끝에 국경 명시는 삭제됐다. 종교 문제는 “이스라엘의 반석(Tzur Yisrael)”이라는 표현으로 타협했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에게는 하느님으로,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민족과 국가의 힘으로 읽힐 수 있는 중의적 표현이었다.

오후 4시, 벤구리온의 낭독이 시작됐다. “이스라엘 국가의 수립을 선언합니다.” 참석자들이 일어나 하티크바(Hatikvah)를 합창했다. 오케스트라가 반주를 시작하기도 전에 사람들의 노래가 식장을 가득 메웠다. 이스라엘 국가기록원 자료에 따르면, 벤구리온이 낭독한 것은 완성된 두루마리가 아니라 등사본 인쇄물이었다. 나라가 태어나는 순간도 즉흥의 연속이었다.


선언이 끝나자 트루먼 대통령의 승인이 11분 만에 도착했다. 그날 밤, 이집트 공군이 텔아비브를 폭격했다. 그리고 벤구리온은 일기에 이렇게 썼다. “국민들은 환호하고 있다. 그러나 11월 29일 때처럼, 나는 이 기쁨 속에서 다시 한번 애도한다. 나는 즉시 군 본부로 복귀했다.“
제4장: 다섯 군대가 쏟아졌다
제1차 중동전쟁의 시작
5월 15일 새벽, 영국의 위임통치 종료와 동시에 이집트, 트란스요르단, 시리아, 이라크, 레바논 5개국 군대가 일제히 이스라엘 국경을 넘었다. 팔레스타인 내전이 공식적인 국가 간 전면전, 제1차 중동전쟁(1948 Arab-Israeli War)으로 전환되는 순간이었다.

숫자만 놓고 보면 결과는 정해진 것처럼 보였다. 아랍 연합군은 영국과 프랑스제 야포, 장갑차, 이집트의 스핏파이어 전투기를 보유한 정규군이었다. 반면 이스라엘에는 1948년 5월 중순까지 야포가 단 한 문도 없었다. 전차는 한 대도 없었고, 전투기도 없었다. 방어선은 상업용 트럭에 철판을 두른 즉석 장갑차에 의존했다. 다만 총병력 비교에서는 상황이 다르다. 여러 연구는 당시 이스라엘 측 전력을 2만5천~6만5천 명으로 넓게 추산하는 반면, 아랍 연합군 침공 초기 병력은 2만1천~2만3천 명 선으로 본다. 절대적 수적 열세는 아니었다. 체감 위기는 숫자보다 질적 격차에서 나왔다. 아랍 연합군 쪽에는 영국 장교단이 훈련한 정예 요르단 아랍 군단이 있었고, 이스라엘에는 흔한 중화기도 없었다.

이집트군은 가자 방면에서 해안선을 따라 북상하며 텔아비브를 향했다. 5월 말, 선두 부대는 텔아비브 남쪽 30킬로미터까지 접근했다. 요르단의 아랍 군단은 예루살렘을 공격해 5월 28일 구시가지 유대인 구역을 함락시켰다. 수백 년 된 유대교 회당들이 사흘 만에 잿더미가 됐다.

수세의 이스라엘, 라트룬 함락
아랍 군단은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는 간선도로의 요충지 라트룬(Latrun)까지 장악했다. 서예루살렘에 갇힌 유대인 10만 명을 향한 식량과 물의 보급이 완전히 끊겼다. 시리아군은 북부 갈릴리의 유대인 정착촌들을 압박했다.
이스라엘의 라트룬 돌파 시도는 두 차례 이어졌다. 5월 25일의 빈눈 알레프 작전(Operation Bin Nun Aleph)과 5월 30일의 빈눈 베트 작전(Operation Bin Nun Bet). 두 번 모두 막대한 손실을 내고 물러났다. 이 전투에는 유럽에서 홀로코스트를 생존하고 팔레스타인에 도착한 지 며칠 되지 않은 이민자들이 다수 투입됐다. 히브리어를 몰랐고, 총을 제대로 잡아본 적도 없었다.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이들이 낯선 땅의 전선으로 그대로 밀려들어갔다. 라트룬은 끝내 뚫리지 않았고, 예루살렘은 그대로 굶어가고 있었다.

제5장: 체코슬로바키아로부터의 구원
발락 작전
이스라엘을 구원한 것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왔다. 체코슬로바키아였다.
미국은 1947년 12월부터 팔레스타인 양측에 무기 금수 조치를 시행하고 있었고, 영국은 시오니스트 무장 조직에 무기를 팔지 않았다. 소련은 중동에서 영국의 영향력을 약화시키려 했고, 소련 영향력에 속해 있던 체코슬로바키아 정부는 이스라엘의 무기 구매 요청을 수락했다. 이스라엘 요원들은 체코슬로바키아 자테츠(Žatec) 기지를 중간 거점으로 삼고 야간에 무기를 공수했다. 이것이 발락 작전(Operation Balak)이었다.
체코에서 들어온 것 가운데 가장 결정적인 것은 아비아 S-199 전투기였다. 나치 독일의 메세르슈미트 Bf 109 설계를 바탕으로 체코가 조립한 기종으로, 조종이 까다롭고 사격 체계에 결함이 있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것저것 가릴 처지가 못 됐다. 25대가 분해된 채 밤하늘을 건너와 현지에서 조립됐다.

아드 할롬 공습
5월 29일, 이집트군 장갑차 행렬이 텔아비브 남쪽 30킬로미터 지점 아드 할롬(Ad Halom) 다리를 돌파하려 하고 있었다. 이집트군이 다리를 넘으면 평지가 펼쳐졌고, 텔아비브까지 막을 것이 없었다. 이때 갓 조립을 마친 S-199 전투기 4대가 출격했다. 제2차 세계대전 미 해병대 출신 자원병 루 레나트(Lou Lenart), 훗날 이스라엘 대통령이 되는 에제르 와이즈만(Ezer Weizman), 에디 코헨(Edie Cohen), 모디 알론(Modi Alon)이 이집트 차량 행렬을 향해 급강하하며 70킬로그램짜리 폭탄을 투하했다. 에디 코헨은 대공포에 격추돼 전사했다. 이집트군의 물리적 피해는 미미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 전투기가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이집트군에게는 예상 밖의 사태였다. 진격을 멈춘 이집트군은 그 자리에 참호를 팠다.
제6장: 예루살렘을 살린 산길
마커스의 아이디어
전투기가 남쪽을 막는 동안, 예루살렘은 굶어 죽어가고 있었다.
라트룬을 장악한 아랍 군단이 간선도로를 봉쇄한 지 2주가 넘었다. 서예루살렘 유대인 10만 명에게 식수가 떨어지고 있었다. 하가나의 라트룬 정면 돌파 시도는 두 차례 모두 실패했다. 벤구리온이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은 이 시점이었다.
데이비드 “미키” 마커스(David “Mickey” Marcus). 미 육군사관학교 웨스트포인트 졸업생이자 제2차 세계대전 참전 대령. 유대계 미국인인 그는 벤구리온의 요청으로 이스라엘에 왔고, 이스라엘 최초의 알루프(Aluf, 준장)로 임명됐다. 그의 판단은 단순했다. 정면을 뚫지 못한다면 돌아가면 된다. 라트룬 서쪽의 험준한 바위 산을 가로지르는 비포장 산길을 보급로로 개척하는 것이 그가 세운 계획이었다. 그의 이야기는 1966년 커크 더글러스 주연 영화 《캐스트 어 자이언트 섀도우(Cast a Giant Shadow)》로 만들어졌다.
마커스의 산길 개척 계획에 따라 팔마흐 공병대(하가나 정예 돌격대 팔마흐 소속 공병 부대로, 도로 개설·교량 공사 등 야전 공병 임무를 맡았다)와 민간 자원봉사자 수백 명이 투입됐다. 지프도 전복될 만큼 가파른 절벽 구간에서는 40~50대 자원봉사자들이 20킬로그램짜리 식량 자루와 탄약을 등에 지고 산을 넘었다. 13킬로미터짜리 비포장 산길이 완성되기까지 열흘이 걸렸고, 6월 10일 밤 첫 번째 보급 트럭이 산길을 넘어 예루살렘으로 들어왔다. 제1차 휴전 발효 하루 전이었다.
버마 로드 개척


포위가 풀렸다.

그러나 마커스 대령은 이 길이 열린 다음 날 새벽 숙소 밖으로 나갔다가 아군 초병에게 사살됐다. 침낭을 두른 채 어둠 속에서 다가오는 그를 18세 초병이 침투자로 오인했다. 마커스는 히브리어를 몰라 영어로 “친구다”라고 외쳤지만 그것이 오히려 의심을 샀다. 이스라엘 건국 최초의 준장은 버마 로드가 열린 지 24시간도 지나지 않아 아군 총탄으로 세상을 떠났다.
에필로그: 이스라엘의 승리 — 그리고 사라진 사람들
1948년 6월 11일, 유엔 중재로 4주간의 제1차 휴전이 발효됐다.
개전 초기 이스라엘을 밀어붙이고 있던 아랍 연합군에게 이 휴전은 치명적인 오판이었다. 이스라엘에게 그것은 국가의 운명을 바꿀 시간이었다. 체코슬로바키아에서 대포, 장갑차, 탄약이 대량으로 들어왔다. 벤구리온은 하가나, 팔마흐, 이르군 등 각기 다른 지휘권 아래 있던 무장 조직들을 해체하고 단일 지휘 체계의 이스라엘 방위군(IDF)으로 통합했다. 해외에서 온 자원 참전 병사들 — 마할(Machal) — 은 제2차 세계대전 실전 경험을 가진 베테랑들이었고, 신생 군대의 전투 역량을 단기간에 끌어올렸다.
7월 9일 전투가 재개됐을 때, 이스라엘군은 4주 전의 이스라엘군이 아니었다. 중화기와 전투기를 갖춘 이스라엘은 7월 공세에서 리다(Lydda)와 람레(Ramle)를 점령하고 네게브 전선에서 이집트군을 밀어냈다. 7월 18일 2차 휴전이 발효됐지만, 이스라엘은 멈추지 않았다. 10월에는 요아브 작전(Operation Yoav)으로 네게브를 완전히 장악하며 이집트군 주력을 포위했고, 갈릴리에서는 히람 작전(Operation Hiram)으로 아랍 해방군을 사흘 만에 격파하고 북부 전선을 마무리했다.

1949년 2월 이집트를 시작으로 레바논(3월), 요르단(4월), 시리아(7월)와 정전 협정이 차례로 체결됐다. 이라크는 끝내 협정에 서명하지 않은 채 군대만 철수시켰다. 그러나 5개국의 군사적 행동은 모두 멈췄다. 1948년 5월 15일 시작된 전쟁이 14개월 만에 막을 내렸다. 이스라엘은 유엔 분할안이 배정한 56%가 아니라 팔레스타인 전체의 약 78%를 손에 쥔 채로 승전했다.
그 전쟁 동안 팔레스타인 아랍인 70만 명이 사라졌다. 어디로, 어떻게 사라졌을까.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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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출처
이스라엘 국가기록원
미 국무부 역사국(Office of the Historian)
트루먼 도서관 외교 문서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Journal of Palestine Studies
미 국무부 외교문서(FR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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