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1년 12월 16일, 전함 야마토(大和)는 공식 취역했다. 많은 사람은 이 날짜를 ‘세계 최강 전함이 바다에 나온 날’로 기억한다. 하지만 실제로 그날의 공기는 전혀 달랐다. 불과 아흐레 전인 12월 7일, 일본 항공대는 진주만에서 미국 전함들을 공중에서 두들겼다. 그리고 엿새 전인 12월 10일, 영국의 신예 전함 프린스 오브 웨일스와 순양전함 리펄스는 말레이 해역에서 일본군 항공기 공격만으로 격침됐다. 야마토가 태평양에 모습을 드러낸 그 순간, 세계는 이미 전함이 아니라 항공모함과 비행기가 바다의 문법을 바꾸고 있다는 사실을 보고 있었다.
야마토는 늦게 태어난 배였다. 더 정확히 말하면, 태어날 때부터 이미 시대가 바뀌고 있는 배였다. 일본 해군은 그것을 몰랐던 것이 아니다. 1편에서 보았듯이 내부에도 경고는 있었다. 그런데도 일본은 이 거대한 전함을 끝내 포기하지 못했다. 왜였을까. 그리고 왜 그 배는, 그렇게 거대했음에도 전쟁 내내 거의 싸우지 못했을까.

해전은 공중전이 되었다
야마토는 1937년 11월 기공됐고, 1940년 8월 8일 진수됐다. 그 사이 세계는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무너지고 있었다. 유럽에서는 프랑스가 무너졌고, 영국은 홀로 독일과 맞서고 있었다. 1940년 9월 일본은 독일, 이탈리아와 함께 삼국동맹을 맺었고, 해군 군축 체제는 사실상 붕괴 수순에 들어갔다. 일본이 야마토를 만들기로 결심한 배경에는 단순한 군사기술 경쟁만이 아니라, 미국과 영국이 짜놓은 해군 질서에서 밀려났다는 오랜 분노도 깔려 있었다.
미국 국무부 산하 Office of the Historian에 따르면, 1922년 워싱턴 회의에서 미국, 영국, 일본, 프랑스, 이탈리아는 주력함 총톤수 비율을 5 : 5 : 3 : 1.75 : 1.75로 정했다. 이 회의는 제1차 세계대전 뒤 감당하기 어려워진 해군 군비경쟁을 멈추기 위해 열린 것이었다. 즉 미국과 영국이 각각 5를 가질 때 일본은 3만 허용된다는 뜻이었다. 일본이 이 수치를 받아들인 것은 단순히 순순히 동의해서가 아니었다. 미국과 영국을 상대로 끝없는 건함 경쟁을 벌일 산업력과 재정이 없었고, 외교적으로도 그 이상을 관철할 힘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동시에 일본 해군 내부에는, 태평양 서부의 지리적 이점과 함대결전 구상을 감안하면 미국과 영국의 60퍼센트 전력으로도 언젠가 승부를 볼 수 있다는 계산도 있었다. 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이 합의는 더 오래 앙금으로 남았다. 일본은 현실적으로는 받아들였지만, 감정적으로는 처음부터 자신이 미국과 영국보다 한 단계 아래의 해군으로 규정됐다고 느꼈다. 1930년 런던 해군 회의는 이 기본 구도를 유지한 채 순양함과 구축함 같은 보조 전력의 톤수까지 다시 조정한 회의였는데, 일본은 이 체제를 자기들을 영원히 열세에 묶어두는 질서로 받아들였다. 그러니 야마토는 태평양 전쟁 직전의 산물이면서도, 동시에 1920년대부터 쌓여온 제국 해군의 열패감과 복수심이 응결된 산물이기도 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따로 있었다. 야마토가 진수되던 1940년 여름과 가을, 바다 위에서는 이미 거대한 변화가 진행 중이었다. 예전 같으면 ‘전함이 몇 척 더 많으냐’가 핵심이었겠지만, 이제는 ‘누가 먼저 항공기로 상대 함대를 무력화하느냐’가 더 중요해지고 있었다. 야마토는 거대한 몸집으로 이 변화를 역행하려 했지만, 세상은 기다려주지 않았다.
역사가 보여주는 전함의 황혼
전함의 시대가 저물고 있다는 말은 후대의 해석이 아니다. 야마토가 취역하던 전후의 사건들만 시간순으로 놓아봐도, 흐름은 이미 명백하다.
- 1940년 11월, 타란토 공습: 영국 항공모함 일러스트리어스에서 출격한 21대의 소드피시 뇌격기가 정박 중이던 이탈리아 전함들을 강타했다. 이 공격은 수상함 주포전이 아니라, 느린 항공기 몇십 대가 항구 안 전함 전력을 무력화할 수 있음을 보여준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 1941년 12월 7일, 진주만 공격: NPS 자료와 관련 정리를 종합하면 Battleship Row에 있던 미 전함들은 집단적으로 타격을 입었고, 4척이 침몰 또는 좌초, 나머지도 큰 피해를 입었다. 전함은 더 이상 두꺼운 장갑만으로 살아남는 무기가 아니었다.
- 1941년 12월 10일, 프린스 오브 웨일스와 리펄스 격침: 전함과 순양전함이 항해 중이었음에도, 공중 엄호 없이 일본군 항공기의 집중 공격을 버티지 못했다. 이것은 “정박 중인 전함은 취약하다”를 넘어, 움직이는 최신예 전함조차 항공기에 압도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 1942년 5월, 산호해 해전: 미국 해군 역사유산사령부(NHHC) 자료가 강조하듯, 이 해전은 수상함끼리 서로를 보지 못한 채 항공기만으로 싸운 첫 대규모 해전이었다. 바다의 주역이 누군지 규칙 자체가 바뀐 것이다.
- 1942년 6월, 미드웨이 해전: NHHC 자료 기준으로 일본은 항공모함 4척, 항공기 256대, 2,200명 이상을 잃었다. 전함 간 포격전이 아니라, 함재기와 정보전이 태평양 전쟁의 균형을 뒤집은 순간이었다.
1940년 타란토, 1941년 진주만, 1941년 말레이 해역, 1942년 산호해, 1942년 미드웨이로 이어지는 흐름이 모두 같은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즉, 야마토가 취역하던 무렵 바다는 아직 전함의 시대를 끝낼지 말지 고민하고 있던 것이 아니라, 이미 여러 차례 실전으로 시험한 끝에 항공전 중심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일본은 왜 야마토를 버리지 못했나
그렇다면 일본 해군은 왜 더 빨리 돌아서지 못했을까. 답은 하나가 아니다. 교리, 정치, 자존심, 이미 쏟아부은 돈과 기술, 그리고 상징의 힘이 한꺼번에 얽혀 있었다.
첫째, 함대결전사상은 단순한 전술이 아니라 거의 신앙에 가까웠다. 1905년 러일전쟁의 쓰시마 해전, 즉 일본 연합함대가 러시아 발틱 함대를 거의 일방적으로 격파한 승리의 기억은 일본 해군 전체의 자기이해를 규정하고 있었다. 언젠가 미국 주력함대가 태평양을 건너오면, 일본은 근해로 끌어들여 마지막 포격전으로 승부를 본다. 이 구도 속에서 전함은 여전히 전쟁의 왕이었다. 항공모함은 어디까지나 결전을 돕는 보조수단으로 취급되기 쉬웠다.
둘째, 야마토는 너무 비쌌다. 이건 단순히 “비용이 많이 들었다”는 뜻이 아니다. 그렇게 많은 강철과 예산, 노동력, 정치적 위신을 쏟아부은 뒤에는, 누구도 쉽게 “이건 시대착오였다”라고 인정할 수 없게 된다. 거대한 조직일수록 그렇다. 잘못을 인정하는 순간, 지금까지의 계획과 교리, 인사 체계와 이해관계가 한꺼번에 흔들리기 때문이다.
셋째, 야마토라는 이름 자체가 하나의 정치였다. 이 배는 그냥 커다란 전함이 아니었다. ‘야마토’는 일본 그 자체를 시적으로 부르는 이름이기도 했다. 즉, 이 배를 포기한다는 것은 군함 한 척을 포기하는 문제가 아니라, 제국 스스로가 상상한 자기 상징 하나를 내려놓는 일이었다. 그래서 야마토는 군사 자산이면서 동시에 심리적, 정치적 자산이었다.
일본은 딜레마에 빠졌다. 항공전의 시대가 오고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렇다고 제국의 상징을 하루아침에 버릴 수도 없었다. 그래서 야마토는 가장 강한 배이면서도, 동시에 가장 다루기 어려운 배가 된다. 너무 귀해서 함부로 못 쓰고, 너무 상징적이라 없어져도 안 되고, 그렇다고 없던 배처럼 무시할 수도 없는 존재. 바로 그 애매함이 이후 야마토의 운용 방식을 결정했다.
가장 강한 배가 가장 뒤에 있었다
이 모순은 미드웨이에서 가장 선명하게 드러난다. 1942년 6월 일본 해군이 미드웨이 작전에 나섰을 때, 야마토는 연합함대 사령장관 야마모토 이소로쿠의 기함으로 작전에 참가했다. 하지만 그 참가란,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최강 전함의 돌진”과는 거리가 멀었다. PBS NOVA 자료와 여러 전사 정리에 따르면, 야마토는 전투의 결정적 접점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고, 실질적으로는 후방의 지휘소에 가까운 역할을 했다.
여기에는 이유가 있었다. 일본 해군은 여전히 언젠가 전함끼리 맞붙는 결전이 올 것이라 믿었고, 그날을 위해 야마토를 아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가장 강한 배를 가장 앞에 세우지 않았다. 항공모함 부대가 먼저 적과 부딪히고, 전함은 나중에 ‘마무리’를 해야 한다는 오래된 그림이 여전히 머릿속에 남아 있었던 것이다.
문제는 현실이 그 그림을 전혀 따라주지 않았다는 점이다. 미드웨이에서 불타고 가라앉은 것은 적 전함이 아니라 일본의 항공모함들이었다. 전함이 결전을 완성하기 전에, 항공기가 먼저 전쟁을 결정해버린 것이다. 야마토는 존재했지만, 전장의 문법 바깥에 서 있었다. 이 거대한 배는 싸움의 중심을 결정하지 못한 채, 전투의 핵심 장면에서 비켜 서 있었다.
이 장면은 상징적이다. 야마토는 약해서 못 싸운 것이 아니다. 너무 강하다고, 너무 귀하다고 여겨져서 오히려 전쟁의 진짜 중심에 들어가지 못했다. 그러나 무기는 쓰이지 않으면 상징이 되고, 상징은 전쟁이 길어질수록 현실과 점점 멀어진다.
야마토 호텔
미드웨이 이후 야마토는 더더욱 애매한 존재가 되었다. 항공모함 4척을 잃은 일본 해군은 야마토를 전선에 밀어 넣기보다 오히려 더 조심스럽게 다루기 시작했다. 제공권이 없으면 이 배도 위험하다는 사실이 너무 분명해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결과는 역설적이었다. 거대한 전함은 전쟁의 해결사가 아니라, 후방에 묶여 있는 떠다니는 본부가 되어갔다.
PBS NOVA 다큐멘터리 대본에서 역사가 맬컴 뮤어는 아주 인상적인 말을 남긴다. 그에 따르면 야마토는 1942년 8월 말부터 1943년 5월까지 사실상 단 하루만 바다에 나갔다. 그 긴 시간 동안 이 배는 전쟁의 한복판이 아니라 후방 정박지와 모항에서 머물렀고, 수병들 사이에서는 비아냥 섞인 별명까지 붙었다. “야마토 호텔.”

이 별명은 잔인할 만큼 정확하다. 야마토는 제국 해군이 가진 가장 거대한 상징이었지만, 동시에 너무 귀해서 전장에 던질 수 없는 전력이었다. 생존자 회고에 따르면 함내 식사는 다른 곳보다 월등했고, 흰쌀밥과 술이 나오는 일도 있었다. 전선의 병사들이 굶주림과 열대병, 미군의 폭격에 시달리는 동안, 가장 비싼 전함은 상대적으로 나은 환경 속에서 정박지를 떠돌았다. 여기서 드러나는 것은 단순한 사치가 아니다. 실제 전쟁이 벌어지는 곳과, 일본 해군이 아직도 전쟁의 중심이라고 믿는 것이 서로 어긋나 있었다는 사실이다.
오지 않은 결전
한때 일본 해군은 야마토가 언젠가 태평양에서 미국 전함과 정면으로 맞붙으리라 믿었다. 그러나 그런 날은 오지 않았다. 진주만은 항공모함이 열었고, 산호해는 서로 얼굴도 못 본 채 끝났고, 미드웨이는 함재기가 승부를 갈랐다. 야마토가 기다리던 ‘전함의 전쟁’은 실제 역사 속에서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일본은 이 배를 계속 붙들었다. 버리지 못했고, 결전을 기다렸고, 상징에 기대었다. 하지만 전쟁은 상징을 기다려주지 않았다. 다음 편에서 보게 되겠지만, 그렇게 오래 아껴둔 배는 결국 자신이 태어난 이유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전장에 끌려나오게 된다. 그리고 그 첫 본격적 등장조차, 이미 너무 늦은 순간이었다.
출처
이미지 출처
`images/wiki-commons_pearl-harbor_battleship-row_19411207.jpg`: [Wikimedia Commons – Battleship Row at the start of the attack on Pearl Harbor, December 7, 1941](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Battleship_Row_at_the_start_of_the_attack_on_Pearl_Harbor,_December_7,_1941._(c4e77252-1dd8-b71b-0bf0-ea4350912f11).jpg)
`images/wiki-commons_yamato_truk-anchor_19420923.jpg`: [Wikimedia Commons – Japanese-Battleships.jpg](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Japanese-Battleships.jpg)
생성형 이미지: 본문에 사용한 생성형 이미지는 Google Gemini로 제작했다.
본문 출처
[대와 뮤지엄 – 숫자로 보는 전함 야마토](https://yamato-museum.com/yamato-data/)
야마토의 기공, 진수, 준공 시점과 기본 제원 확인
[미국 국무부 Office of the Historian – The London Naval Conference, 1930](https://history.state.gov/milestones/1921-1936/london-naval-conf)
5:5:3 비율, 일본의 해군 군축 체제 불만, 1930년대 군축 체제의 균열 확인
[Pearl Harbor National Memorial – Battleship Row](https://www.nps.gov/perl/learn/historyculture/battleship-row.htm)
진주만 Battleship Row 개요와 개별 전함 피해 확인
[Pearl Harbor National Memorial – National Pearl Harbor Remembrance Day](https://www.nps.gov/perl/learn/historyculture/national-pearl-harbor-remembrance-day.htm)
1941년 12월 7일 피해 규모 및 진주만 공격 개요 확인
[The National WWII Museum – Forgotten Fights: Strike on Taranto, November 1940](https://www.nationalww2museum.org/war/articles/taranto-november-1940)
타란토 공습의 규모와 의미 확인
[U.S. Navy History and Heritage Command – Battle of the Coral Sea Briefing](https://www.history.navy.mil/content/dam/nhhc/browse-by-topic/War%20and%20Conflict/The%20Battle%20of%20the%20Coral%20Sea/CoralSeaBriefing.pdf)
산호해 해전이 수상함끼리 서로 보지 못한 첫 대규모 항모전이었다는 점 확인
[U.S. Navy History and Heritage Command – Battle of Midway: Summary of Losses](https://www.history.navy.mil/content/dam/nhhc/browse-by-topic/commemorations/commemorations-toolkits/battle-of-midway/graphics/FINAL_Desktop_BattleOfMidway.pdf)
미드웨이에서 일본 항공모함 4척, 항공기 256대 손실 수치 확인
[Imperial War Museums – The Loss of HMS Prince of Wales and Repulse, 10 December 1941](https://www.iwm.org.uk/collections/item/object/205023031)
1941년 12월 10일 말레이 해역에서 두 함선이 일본군 항공기 공격으로 침몰한 사건 확인
[PBS NOVA – Sinking the Supership transcript](https://www.pbs.org/wgbh/nova/transcripts/3212_supershi.html)
야마토가 미드웨이에서 후방 지휘소에 가까운 위치에 있었다는 점, 1942년 8월 말부터 1943년 5월까지 사실상 단 하루만 바다에 나갔다는 점, ‘야마토 호텔’ 별명 관련 서술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