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리 안의 은
16세기 말, 교토의 한 작은 구리 세공소에서 한 남자가 용광로 앞에 쭈그려 앉아 있다. 나이는 스물을 갓 넘었고, 손은 이미 불 앞에서 단련된 장인의 손이다. 그의 이름은 소가 리에몬(曾我理右衛門, 1572~1636). 그는 지금 외국 상인들이 왜 일본의 구리를 저렇게 탐내는지,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그리고 당시 일본인들은 구리 안의 은을 꺼내는 방법을 몰랐다.
은의 시대와 일본의 딜레마
1543년, 포르투갈 상인들을 태운 배 한 척이 규슈 남쪽 다네가시마(種子島)에 표착했다. 그들이 들고 온 물건 중 가장 충격적인 것은 조총이었지만, 그들이 진짜 노리던 것은 따로 있었다. 바로 일본의 은이었다.
당시 세계 경제의 핵심 통화는 은이었다. 스페인은 남아메리카 포토시 은광에서 퍼올린 은으로 세계 무역을 지배하고 있었고, 명나라는 1581년 일조편법(一條鞭法, 당시 중국은 쌀, 비단, 부역 등 납세 수단이 다양했는데, 오직 은으로만 세금을 받기로 한 것이다) 시행 이후 세금을 전부 은으로 받게 되면서 은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이고 있었다. 중국이 은을 쓸어담으면 쓸어담을수록, 은을 가진 자의 권력은 커졌다.
그 와중에 일본에는 세계적 규모의 은광이 있었다. 이와미 은광산(石見銀山, 시마네현)은 16세기 중반 전 세계 은 생산량의 3분의 1을 담당했다고 추정될 정도 였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일본의 기술자들은 은광석에서 은을 그런대로 뽑아낼 수 있었다. 그런데 구리광석 속 은은 달랐다. 구리와 은은 서로 뒤섞여 있었고, 당시 일본의 제련 기술로는 이 둘을 제대로 분리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일본은 은이 잔뜩 섞인 구리, 이른바 조동(粗銅, blister copper)을 그냥 팔고 있었다. (조동이란 광석에서 1차 제련 과정을 거쳐 나온 구리로, 순도 약 98~99% 수준의 거친 구리다. 완전한 순도가 아니라 내부에 여전히 은과 각종 불순물을 품고 있다.)
이 조동을 사가는 게 포르투갈 상인들이었다. 그들은 조동을 싼값에 대량 매입한 뒤, 자국이나 인도에서 은을 분리해 막대한 차익을 챙겼다. 일본은 영문도 모른 채 자국의 은을 헐값에 외국으로 내보내고 있었던 셈이다. 국부 유출이라는 개념이 없던 시대의, 그러나 대단히 실질적인 국부 유출이었다.
조선의 은 제련술은 어땠을까
흥미롭게도 이 시기 구리에서 은을 분리하는 제련 기술을 동아시아에서 가장 앞서 발전시킨 건 조선이었다.
조선은 연은분리법(鉛銀分離法), 즉 납을 이용해 은을 분리하는 기술을 일찍부터 발전시켰다. 납과 은은 서로 친화력이 높아, 납을 녹여 은이 섞인 광석에 붓고 이를 다시 가열하면 납이 산화해 날아가고 순은만 남는 원리다. 조선 중기에는 이 기술이 정부 관리하에 공식적으로 운영됐고, 조선의 은은 명나라와의 중계 무역에서 핵심 결제 수단이 됐다.
남만불기(Nanban-buki)라는 이름은 “서양에서 온 제련법”이라는 뜻이지만, 그 기술의 원리 자체는 동아시아에서도 이미 알려진 납-은 분리법과 맥을 같이한다. 다만 유럽 상인들이 더 정교하게 산업화한 형태로 일본에 전파했다는 점이 다르다. 실제로 소가 리에몬이 태어나기도 전, 1533년(중종 재위 시절) 조선의 기술자 경단과 종비가 일본에 연은분리법을 전해줬다.
소가 리에몬, 이즈미야를 열다
1590년, 19세의 소가 리에몬은 교토에 이즈미야(泉屋)라는 상호를 내걸고 구리 비즈니스를 시작했다. 그는 젊은 시절 당시 금속 세공업의 중심지였던 사카이(堺)에서 구리 제련과 세공 기술을 익혔다. 사카이는 규슈를 통해 들어오는 포르투갈·네덜란드 상인들과 직접 접촉할 수 있는 창구였고, 리에몬은 그 현장에서 외국 상인들이 조동에서 무엇을 꺼내는지, 그 냄새를 맡고 있었다.
이즈미야를 열 때부터 리에몬은 井桁(이가타)라는 문장(紋章)을 상표로 쓰기 시작했다는 기록이 스미토모 공식 연혁에 남아 있다.
우물 정(井) 자 모양을 가로세로로 겹친 격자 형태의 문양이다. 마치 해시태그(#) 모양을 큼직하게 그린 것과 비슷하게 생겼다. 이 이가타 마크는 400년이 지난 지금도 스미토모 그룹 로고의 근간이 된다.
납이 은을 끌어낸다 — 남만불기의 원리
포르투갈 상인들과의 접촉 속에서 리에몬은 핵심 정보를 입수했다. 납(鉛, Lead)을 이용하면 구리에서 은을 분리할 수 있다는 것.
원리는 이렇다:
먼저 조동(은이 섞인 거친 구리)을 고온으로 가열해 녹인다. 여기에 납을 함께 넣으면, 납은 구리보다 은에 훨씬 강한 친화력을 발휘한다. 쉽게 말해 납이 은을 “좋아해서” 은을 자기 쪽으로 끌어당긴다. 이렇게 되면 납-은 합금이 구리에서 분리되어 가라앉는다. 이 납-은 합금을 다시 꺼내 회흡법(灰吹法, cupellation)이라는 공정에 넣는다. 고온의 공기를 불어넣으면 납이 산화해 납 산화물이 되어 도가니의 재에 흡수되고, 순은(純銀)만 둥그렇게 굳어 남는다.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1596~1615년 사이(게이초 연간) 리에몬은 드디어 안정적으로 조동에서 은을 분리해내는 이 공정을 완성했다. 이것이 바로 남만불기(南蛮吹き, 서양에서 온 제련법)다.
소가와 스미토모, 두 집안이 합쳐지다
이제 ‘스미토모’라는 이름이 어떻게 등장하는지 짚어야 한다.
소가 리에몬이 구리 사업을 키워가던 같은 시기, 교토의 또 다른 인물이 있었다. 스미토모 마사토모(住友政友, 1585~1652). 그는 승려 생활을 하다 환속하여 교토에서 서적과 약재를 파는 가게를 열었다.
마사토모는 승려 출신답게 경영 철학이 독특했다. 손님에게 약재의 효능을 설명할 때도, 책의 가치를 이야기할 때도 마치 법문을 설하듯 정직하고 진지했다. 사람들은 그런 그를 보며 “저 사람은 장사꾼이 아니라 도인이다”라며 혀를 내둘렀다. 이 지독할 정도의 정직함과 결벽에 가까운 도덕성은 훗날 스미토모 가문의 흔들리지 않는 뿌리가 된다.
이 두 집안은 혼인으로 연결됐다. 리에몬의 누이가 마사토모에게 시집갔다. 즉 마사토모와 리에몬은 처남-매형 관계였다. 그 다음 세대에서 두 집안은 완전히 융합된다. 리에몬의 장남 도모모치(友以, 1607~1662)가 마사토모의 딸과 혼인하여 스미토모 가문에 입적했다. (사돈어른이 장인이 되고, 성도 장인의 성으로 바꾼 셈이다) 도모모치가 스미토모 성을 갖게 되면서, 소가 리에몬이 일군 구리 사업(이즈미야)과 스미토모 마사토모의 상인 철학이 비로소 하나의 집안, 하나의 기업으로 통합됐다.
즉 스미토모라는 이름은 처음부터 구리 사업을 한 게 아니다. 구리는 소가 리에몬이 만들었고, ‘스미토모’라는 브랜드와 경영 철학은 마사토모가 심었다. 이 둘이 혼인으로 융합된 것이다.
마사토모가 남긴 경영 철학서 『문수원시가(文殊院旨意書)』는 이 가문의 정신적 헌법이 됐다. “눈앞의 투기적 이익을 쫓지 말라(부리추구 금지)”, “나와 남을 함께 이롭게 하라(공사일여)”. 구리를 다루는 장인 집단에 상인의 윤리가 더해진 것이다.
호코지 범종 사건
여기서 여담이지만 중요한 여담이 있다. 남만불기로 막대한 부를 쌓은 리에몬은 1614년 교토 히가시야마의 호코지(方広寺) 사찰이 새 범종을 만들 때, 필요한 구리 대부분을 헌납했다. 재력과 사회적 영향력의 과시였다.
그런데 이 범종이 역사를 뒤흔들 줄 누가 알았겠는가.
범종에는 “国家安康(국가안강)”이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나라가 편안하고 안정되기를 바란다”는 뜻이다. 그러나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 덕천가강)의 책사 덴카이 스님은 이 네 글자를 의도적으로 비틀어 읽었다. “国家安康“을 “家康(이에야스)”의 이름 글자 ‘安’을 가운데에 집어넣어 글자를 쪼갠 것, 즉 이에야스를 저주하는 문구라고 주장한 것이다. 그리고 바로 뒤에 이어지는 “君臣豊楽(군신풍락)”의 ‘豊’ 자는 도요토미(豊臣) 가문을 뜻한다고 덧붙였다. 요약하면: “이에야스를 갈라놓고 도요토미를 번영시킨다” — 완전히 억지 해석이었지만, 정치적으로는 더없이 유용한 구실이었다.
기술이 돈이 되는 시대 – 재벌의 시작
남만불기 기술의 완성은 단순히 스미토모 가문을 부자로 만든 게 아니었다. 이 시기 일본 전체가 금속 수요의 폭증 시대로 진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국 시대를 통일한 도쿠가와 막부(德川幕府)는 전국 각지에 성을 쌓고 도로를 내고 화폐를 주조했다. 오다 노부나가 이후 총기가 전쟁의 판도를 바꾸면서 총포의 수요도 폭증했다. 에도를 새 수도로 건설하는 과정에서는 건축·공예·조각 등 금속 수요가 더욱 커졌다. 이 모든 것의 원료가 구리였고, 은이었다.
이 시대에 정련 기술은 단순한 장인 기술이 아니라 “부를 만드는 열쇠”였다. 금속을 가공하는 능력이 곧 돈과 직결됐다.
소가 리에몬이 남만불기를 완성한 시점은 정확히 이 수요 폭증의 시대와 맞물렸다. 이즈미야는 일본 전역에서 생산된 조동을 사들여 은을 빼내고, 고순도 구리를 납품했다. 추출한 은은 동아시아 무역의 결제 수단이 됐고, 명주·도자기가 역수입됐다. 이즈미야는 제련회사임과 동시에 무역회사이자 환전회사였다.
스미토모 재벌의 씨앗은 이렇게 뿌려졌다. 한 남자가 용광로 앞에서 은광석을 붙잡은 그 순간부터. 다음 편은 스미토모를 한 단계 도약시킨 “벳시 동광” 이야기다.
출처
– Sumitomo Group Public Affairs Committee, “Riemon Soga” — https://www.sumitomo.gr.jp/english/history/chronology/04/
– Sumitomo Metal Mining, “The History of Sumitomo Metal Mining 1590 onward” — https://www.smm.co.jp/en/corp_info/story/01/
– Wikipedia, “Sumitomo Group” — https://en.wikipedia.org/wiki/Sumitomo_Group
– Wikipedia, “Iwami Ginzan Silver Mine” — https://en.wikipedia.org/wiki/Iwami_Ginzan_Silver_Mine
– Wikipedia, “Hōkō-ji” — https://en.wikipedia.org/wiki/H%C5%8Dk%C5%8D-ji
– Britannica Money, “Sumitomo Group” — https://www.britannica.com/money/Sumitomo-Group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