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쓰이 가문의 시작: 도주한 패잔병에서 거상으로
미쓰이 제국의 시작은 화려한 영웅담이 아니라, 패잔병의 처절한 도주였다. 1568년, 에치고(지금의 니가타현)의 다이묘였던 미쓰이 다카야스는 천하포무의 직전신장(!) 오다 노부나가에게 패배했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이세 지방(지금의 미에현)으로 도망친 그는 무사의 칼을 버리고 술과 된장을 파는 상인이 되었다. 몰락한 사무라이 가문은 그의 손자대에 이르러 일본 최고의 상인 가문으로 부활한다.
< 미쓰이 다카토시 >
미쓰이 다카토시(1622-1694)는 다카야스의 손자로서 8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경영 능력이 뛰어난 어머니의 피를 이어받은 다카토시는 14살 때 형이 가게를 낸 에도로 상경했다. 그러나 그의 재능이 너무 뛰어났던 탓일까? 동생의 수완을 두려워한 형의 견제로 인해 그는 28살의 나이에 다시 고향 이세로 쫓겨나게 된다.
그 후 무려 20년 넘게 고향에 발이 묶여 지냈다. 그 시간동안 다카토시는 금융업과 도매업을 하며 자금을 모으고 때를 기다렸다. 그렇게 24년이라는 시간이 흐르고 형이 죽었다. 52세 때 비로소 다시 에도 땅을 밟고 독립했다. 1673년, 그는 에도의 니혼바시에 ‘에치고야’ 포목점을 열고 상업의 판도를 뒤집는 혁신을 단행한다. (할아버지의 고향을 잊을 수 없었나 보다. 에치고야라니..)
“현금 정찰제(現金掛け値なし)”—흥정 없이 정가에 현금 거래.
“치수 판매(切り売り)”—원단을 통째로가 아니라 원하는 길이만큼만 판매.
흥정이 당연하던 시절, 현금 정찰제를 도입했고, 비싼 원단을 통째로 파는 게 아니라 손님이 필요한 만큼만 잘라서 팔았다. “극장, 생선시장, 에치고야가 각각 하루 1000냥을 번다”는 속담이 생길 정도로 번창했고, 훗날 미쓰코시 백화점의 모태가 된다.
< 긴자 미쓰코시 백화점 >

< 신세계 백화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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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정봉환: 권력 반환의 속임수와 개혁의 도화선
잠깐 미쓰이 가문이 아니라 일본 역사를 전반적으로 살펴보자. 250년간 평화롭던 에도 시대도 제국주의 팽창에 흔들리기 시작했다. 1853년 에도만에 페리 제독의 흑선이 나타났고, 막부는 미국과 불평등 조약을 맺었다. 요코하마에는 생전 처음보는 서양인들이 활보했다. “오랑캐를 몰아내고(攘夷)”, “천황을 받들자(尊王)”는 목소리가 합쳐져 막부를 향했다. 1867년, 마지막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정권을 천황에게 반환했다. 대정봉환(大政奉還). 하지만 진짜 난세는 이제부터였다.
< 흑선의 등장 >

쇼군의 계산은 빗나갔다. 그는 형식적으로만 정권을 넘기고, 실제로는 자신이 새로운 의회의 수장이 되어 권력을 유지하려고 했다. 하지만 사쓰마와 조슈를 주축으로 한 반(反)막부 세력들은 바보가 아니었다. (이 때 천황편에서 일본의 개혁을 주도했던 이들을 ‘유신 지사’라고 부른다. 사카모토 료마가 대표적인 유신 지사. 물론 그들이 이겼으니 ‘지사’라는 좋은 호칭이 붙은 것이다. 김옥균은 지사가 못 되지 않았는가)
그들은 해가 바뀌자마자 곧바로(1868년 1월 3일) “왕정복고의 대호령(“오세이 훗코노 다이고레이!”)”을 내리며 도쿠가와 가문의 영지와 관직을 싹 다 뺏겠다고 선언했다. 쇼군의 숨통을 완전히 끊어버리려는 수였다.
< 왕정복고의 대호령 >

보신전쟁: 일본 근대사 최대의 내전
어떻게 해결을 봤겠는가? 무사의 나라답게 칼을 들었다. (이때 막부파와 천황파 갈등 국면에서 막부편에 선 무장 테러 집단 중 하나가 그 유명한 신선조)
1868년 1월, 교토 남쪽 도바와 후시미에서 구 막부군과 신정부군이 정면으로 충돌했다. 일본 근대사 최대의 내전, ‘보신전쟁(Boshin War)’의 시작이자, 메이지 유신의 화룡점정이었다. (1868년 일본의 연호가 메이지로 바뀌었다. 메이지 유신이란 그 해 전후의 일본 개혁기를 일컫는 말이다) 일본 열도는 천황파와 막부파로 쪼개져 내전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갔고, 어느 쪽에 줄을 서느냐에 따라 목숨이 오가는 살얼음판이 펼쳐졌다.
< 바람의 검심 >

< 라스트 사무라이 >

< 용과 같이 유신 >

배경설명이 길어졌지만 너무 재미있고 중요한 내용이어서 포스팅했다. 미쓰이 얘기는 다음 화부터 본격적으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