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고아 출신의 흙수저
이쯤에서 이 남자를 소개해야 하는데 조금 난감하다. 왜냐하면 역사 무대에 등장하기 전의 이름은 기록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먼 훗날 미노무라 리자에몬(1821-1877)이 되는 이 남자의 아버지는 데와국(出羽国, 현재의 야마가타현) 쇼나이 번의 무사였으나 낭인이 되어 떠돌았고, 소년은 어린 시절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되어 여러 지방을 유랑하다 19살 때 에도로 상경한다.
< 미노무라 리자에몬 >

< 미노무라 리자에몬과 미쓰이 다카요시 >

그가 정착한 곳은 후카가와(深川). 지금의 도쿄 고토구(江東区) 지역으로, 당시엔 목재상과 창고가 즐비하고 거친 뱃사람과 상인들이 모여 사는 대표적인 ‘시타마치(서민 동네)’였다. 그는 이곳의 ‘마루야(丸屋)’라는 간어류(마른 정어리) 도매상에 취직한다. (요즘도 일본엔 ‘마루야’라는 상호가 많다)

< 도쿄 고토구 >

이 남자의 확인 가능한 첫 직장(아마 그전에도 온갖 험한 일을 했을 것이다)의 사장은 이 똑똑한 직원을 그냥 썩히기 아까웠는지 오구리 타다타카라는 사람에게 하인으로 쓰라며 소개해 준다. 사실 이 남자의 출세길은 바로 여기서부터 열렸다.
< 오구리 타다타카와 미노무라 리자에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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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오구리 가문의 하인, 그리고 운명적 만남
오구리 타다타카. 이 사람은 막부가 임명한 ‘니가타 부교(新潟奉行)’였다. 부교를 우리 식으로 읽으면 ‘봉행’인데, 쇼군의 명령을 받들어(奉) 실무를 행하는(行) 사람이라는 뜻이다. 오구리는 이 지역 번주와 상관이 없는 사람이었다. 왜냐하면 막부가 니가타의 이권을 노리고 원래 주인이었던 나가오카 번으로부터 이 땅을 뺏어 막부 직할령으로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오구리는 온전한 막부 신하(막신)로서 현대적 시장에 가까웠다. 니가타 부교는 시장 겸 법원장 겸 세관장 겸 항만청장을 다 합친 엄청난 자리였다고 한다.
니가타는 현재의 니가타현 니가타시인데, 당시 일본 서쪽 해안(동해 측)의 핵심 항구였다. 쌀과 물자가 배를 타고 이곳에 모여서 에도나 오사카로 넘어가는 물류의 중심지였다. 돈과 사람이 몰리는 곳이니 이 똑똑한 청년이 배울 게 오죽 많았을까.
< 니가타시 >

어쨌든 이 남자는 오구리 가문에서 일하면서 나랏돈이 어떻게 걷히고, 관료들이 어떻게 일 처리를 하는지 ‘어깨너머’로 배웠다. 왜 어깨너머로 배웠다고 추정하느냐면, 오구리 가문에서 그의 직책이 “중간(中間, 추우겐)”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중간이란 무사 집안의 하인 중에서도 무사 신분이 아닌, 잡일을 하는 낮은 직급이었다. 무학(無學)의 생선가게 종업원 출신에게 처음부터 큰 직책을 맡길 리 없지 않은가.
그러나 그가 오구리 가문에서 얻은 결정적인 자산은 업무 지식이 아니었다. 바로 오구리 타다타카의 아들, ‘오구리 타다마사(아명: 마타이치)’와의 인연이었다. 이때 이 남자가 20대 초반, 도련님 타다마사가 10대 중반이었다. 형제처럼, 주종처럼 지낸 이 시절의 인연이 훗날 위기에 빠진 미쓰이를 건져 올리고, 이 남자의 출세길도 활짝 열어주게 된다.
< 마타이치 도련님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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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하인에서 사장으로
그는 25세에 오구리 가문에서 퇴사하고 간다(神田)로 향한다. 간다는 지금의 도쿄 치요다구 일대로, 에도 성 바로 옆에 위치해 상인과 장인들이 모여 살던 에도 최대의 번화가였다.
그는 이곳의 설탕 및 기름 도매상인 ‘키노쿠니야(紀伊国屋)’의 데릴사위(사위양자라고도 한다)로 들어간다. 이때 이름을 ‘미노가와 리하치(美野川利八)’로 바꾸고 상업계에 본격적으로 발을 들였다.
이후 그는 탁월한 수완으로 재산을 모아 환전상 주식(株)을 매입하며 금융업에 진출했다. 여기서 ‘주식’을 샀다는 건, 엔비디아 주식을 샀다는 뜻이 아니다. 에도 시대에는 장사를 하려면 동업자 조합(길드)에 가입해야 했는데, “환전업을 해도 좋다”는 영업 면허권(라이선스)을 돈 주고 샀다는 뜻이다. 이제 그는 단순한 장사꾼이 아니라, 막부가 공인한 정식 금융업자가 된 것이다.
<환전상 데뷔>

[참고 자료 및 이미지 출처]
일본 국립국회도서관 / 위키미디어 공용 / 미쓰이 홍보 위원회 / 코토뱅크 / 일본은행 금융연구소 화폐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