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함 야마토, 제국을 싣고 가라앉다 (3) 죽으러 가는 배

본토 앞까지 밀려온 전쟁

1945년 봄, 일본은 이미 전쟁을 이길 수 있는 나라가 아니었다. 1942년 미드웨이에서 항공모함 전력을 잃은 뒤, 일본 해군은 태평양의 주도권을 서서히 내줬다. 1943년에는 과달카날을 포기했고, 1944년에는 사이판과 티니안, 괌을 잃었다. 그 결과 미국의 B-29 폭격기는 일본 본토를 직접 때릴 수 있게 됐다. 같은 해 레이테 만 해전에서 일본 해군은 남아 있던 대규모 수상함 전력마저 결정적으로 소모했고, 필리핀을 잃으면서 남방 자원지대와 본토를 잇는 해상 교통로도 사실상 끊겼다. 1945년 3월 이오지마까지 함락되자, 미국은 본토 폭격의 중간 기착지와 호위 전투기 운용 거점까지 손에 넣는다.

이쯤 되면 미국이 다음에 어디를 밟을지는 꽤 분명했다. 오키나와는 류큐 열도의 중심이자, 규슈와 대만 사이를 잇는 거대한 발판이었다. 항구와 비행장을 확보할 수 있고, 일본 본토 침공을 위한 집결지로도 쓸 수 있었다. 무엇보다 규슈와 너무 가까웠다. 오키나와가 넘어가면 미국은 일본 본토를 더 자주, 더 가까이, 더 큰 규모로 압박할 수 있다. 그러니까 오키나와 상륙은 단순한 섬 점령전이 아니라, 본토 침공의 문 앞에 미군이 실제로 발을 올리는 사건이었다.

오키나와와 일본 본토
오키나와가 왜 일본 본토 침공의 전진기지로 여겨졌는지를 보여주는 개념 지도 상상도. 류큐 열도, 오키나와, 규슈, 대만의 위치 관계와 본토 방향으로 뻗는 화살표를 통해 미국이 어디까지 올라왔는지를 직관적으로 보여준다.

1945년 4월 1일, 미군은 바로 그 오키나와에 상륙했다. 이제 전쟁은 멀리 남양 군도나 필리핀에서 벌어지는 싸움이 아니었다. 오키나와는 규슈에서 불과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섬이었고, 그 섬이 무너지면 전쟁은 곧 일본 본토의 문제가 된다. 일본군 수뇌부는 그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오키나와 이후의 일본 전략은 승리보다 단순해진다. 어떻게든 미국이 일본 본토 침공을 두려워하게 만들 것.

그때 일본이 쥐고 있던 것은 둘뿐이었다. 하늘에서는 가미카제가, 바다에서는 아직 한 번도 제대로 자기 쓰임을 하지 못한 거대한 전함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 둘은 곧 하나의 절망적인 계산 속에서 묶인다.

오키나와 앞바다의 가미카제
1945년 4월 11일, 오키나와 해역에서 미 구축함 USS Kidd를 향해 돌진하는 일본군 가미카제기. 오키나와 전투는 이제 더 이상 정상적인 해전이 아니라, 일본이 남은 전력을 모조리 소모해 미국의 접근을 조금이라도 비싸게 만들려는 단계로 넘어가고 있었다. © Wikimedia Commons / U.S. Naval History and Heritage Command / NH 75767
1945년 봄의 일본 해군은 승리의 계획이 아니라, 패배를 최대한 비싸게 만드는 계산만 남겨두고 있었다.

남은 것은 비싸게 지는 일 뿐

오키나와 전투는 태평양 전쟁의 마지막 대규모 관문이었다. 미 해군 역사 자료를 보면, 일본은 미군 상륙에 맞서 규슈와 대만 일대에 약 700대의 항공기를 모아두고 있었다. 그리고 4월 6일부터 7일까지 벌어진 첫 번째 기쿠스이(Kikusui, “떠 있는 국화”) 공격에서 일본 해군 230대, 일본 육군 125대, 합계 355대의 가미카제기를 한꺼번에 투입했다. 여기에 더해 약 340대 안팎의 일반 공격기도 함께 움직였다. 이미 일본은 해전의 승패를 뒤집을 수 있다고 믿지 않았다. 대신 상대 함대에 공포와 피로, 그리고 손실을 강요하는 데 남은 힘을 쏟아붓고 있었다.

오키나와 앞바다를 덮는 마지막 공세 – “떠 있는 국화”
1945년 4월 초, 오키나와 상륙에 맞서 일본이 가미카제기와 일반 공격기를 한꺼번에 쏟아붓는 장면을 재구성한 상상도. 이미 승리를 노리는 전투라기보다, 남은 전력을 모조리 소모해 미국에게 공포와 피로를 강요하려는 마지막 공세의 성격을 드러낸다. ‘떠 있는 국화’라는 작전명은 아름답게 들리지만, 실제로는 수백 대의 항공기를 태풍 앞 국화잎처럼 흩어버리는 절망의 이름에 가까웠다.

이때 해군이 받은 압박은 단순한 군사적 압박이 아니었다. 3월 말, 천황 히로히토는 오키나와 방어 계획을 보고받는 자리에서 해군이 무엇을 하고 있느냐는 취지의 질문을 던졌다. 이 질문은 전술적 지침이라기보다, 이미 패배하고 있으면서도 아무것도 못 하고 있는 조직을 향한 상징적 질책처럼 받아들여졌다. 제공권도, 연료도, 호위 전력도 모자라는 해군은 이 질문 앞에서 오히려 더 위험한 결론으로 기울었다. 해군도 무언가 보여줘야 한다는 결론.

그 “무언가”가 바로 텐고 작전(Operation Ten-Go)이었다.


작전이라는 이름의 자살 명령

텐고 작전(직역하면 ‘천호 작전’, 곧 ‘하늘’이라는 부호를 붙인 작전명이다)의 내용은 놀라울 만큼 비현실적이었다. 야마토는 경순양함 야하기와 구축함 8척의 호위를 받으며 오키나와로 향한다. 항공 엄호는 사실상 없고, 미 해군 항공모함 세력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도 다들 안다. 그럼에도 해군 수뇌부가 세운 구상은 이랬다. 야마토가 오키나와 해안에 도달하면 함을 일부러 좌초시켜 거대한 해안포대로 바꾸고, 포탄이 떨어질 때까지 미군을 향해 쏜 뒤 승조원들은 육상으로 올라가 최후까지 싸운다는 것.

이건 작전이라기보다 의식에 가까웠다. 군사적 합리성보다 “해군도 본토 결전에 몸을 던졌다”는 상징이 더 중요했다. 일본은 야마토를 이기기 위해 보내는 것이 아니라, 체면을 잃지 않기 위해 보내고 있었다.

제2함대 사령관 이토 세이이치는 처음부터 이 결정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가 보기에도 이 작전은 인명과 함선, 남은 연료를 한꺼번에 태워버리는 낭비에 가까웠다. 그러나 1945년 4월의 일본군에서 “무의미하다”는 판단은 작전을 멈추는 이유가 되지 못했다. 오히려 그런 판단이 더 철저한 복종으로 덮이기 쉬웠다.

가장 거대한 전함은 그제서야 처음으로 제대로 쓰이게 됐지만, 그 용도는 승리가 아니라 패전을 기념하는 순장에 가까웠다.

야하기의 마지막 브리핑

1945년 4월 5일, 작전 설명이 내려오자 현장 지휘관들은 곧바로 의미를 알아차렸다. 야하기 함상에서 이뤄진 브리핑에서 함장들은 이 계획이 전술적으로 무모하다고 반발했다. 특히 야하기 함장 하라 다메이치는 이것이 사실상 “바위에 계란을 던지는” 격이라고 보았다. 강한 배를 보내는 것이 아니라, 살아 돌아올 방법이 없는 전력을 일부러 적의 제공권 아래로 밀어 넣는 작전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중요한 건, 그들이 죽음을 두려워해 반대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들은 이미 수년 동안 태평양 전쟁 한복판을 통과해 온 장교들이었다. 죽음은 낯선 가능성이 아니었다. 다만 이 작전은 너무 노골적으로 헛된 죽음이었다. 아무리 일본군이라도, 아무리 충성심을 강요받는 조직이라도, 그 사실만큼은 현장에서 숨길 수 없었다.

그 반발을 누르기 위해 연합함대 참모장 구사카 류노스케가 직접 날아왔다. 그는 천황의 기대, 본토 방어, 해군의 마지막 의무 같은 말을 꺼냈다. 이 단계에서 논쟁은 전술의 영역을 벗어난다. 야마토가 오키나와 해역에서 실제로 무엇을 할 수 있느냐보다, 해군이 끝내 무엇을 보여주고 어떻게 죽을 것이냐가 더 중요한 문제가 되어버린 것이다.

(아래 연설문은 당시의 상황과 발언 취지를 바탕으로 상상해 재구성한 문장이다.)

“제군들!

제국이 불타고 있는데 해군만 항만의 그늘 아래 남아 있을 수는 없다.

야마토가 바다에 뜬 이상, 우리는 승산이 아니라 의지를 보여줘야 한다.

설령 이 길의 끝이 침몰이라 해도, 그 침몰은 일본 제국 해군이 마지막까지 싸우다 꺾였다는 증거가 되어야 한다.

오늘 제군들이 바다 위에서 버리는 목숨은 한 척의 함을 위한 것이 아니라, 아직 일본이 스스로 무너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적의 가슴에 박아넣기 위한 것이다.”

야하기의 마지막 브리핑
1945년 4월 5일, 야하기 함상에서 텐고 작전의 세부 내용이 내려오던 순간을 재구성한 상상도. 현장 지휘관들은 죽음을 두려워해서가 아니라, 이 작전이 너무 노골적으로 헛되었기 때문에 반발했다.

떠나기 전 내려보낸 사람들

야마토는 4월 6일 오후, 도쿠야마를 떠났다. 미 해군 역사 자료는 이 함대가 오후 3시 20분에 출항했다고 적고 있다. 편성은 야마토, 야하기, 그리고 8척의 구축함이었다. 겉으로는 아직 해군 전력처럼 보였지만, 실제 내용은 달랐다. 이미 제공권은 없었고, 작전의 목적도 적 함대를 이긴다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 출항 전, 해군은 일부 생도와 고령자, 환자들을 배에서 내려보냈다. 이 조치는 작전의 성격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공식적으로는 출격이었지만, 내부에서는 사실상 돌아오지 못할 가능성이 압도적으로 큰 항해라는 걸 모두 알고 있었다. 흔히 “편도 항해분의 연료만 실었다”는 말이 야마토 최후를 설명하는 문장처럼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현장에서 짜낼 수 있는 만큼의 연료를 최대한 모아 실었다는 기록도 있다. 문제는 연료가 충분했는가가 아니었다. 설령 돌아올 연료가 있었다 해도, 그 배가 돌아올 가능성 자체가 너무 희박했다는 것이다.

바로 그 점에서 텐고 작전은 더 비극적이다. 야마토는 완전히 연료가 떨어진 배도 아니었고, 출항 자체가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유령선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래서 더 끔찍했다. 살아 움직일 수 있는 거대한 배를, 살아 돌아오기 어려운 목적지로 의식적으로 밀어 넣는 결정이었기 때문이다.

유령선이 된 야마토
아직 바다 위를 항해하고 있지만, 이미 살아 있는 전력이 아니라 유령선처럼 보이기 시작한 야마토를 재구성한 상상도. 만약 귀신이 이 배를 봤다면 이렇게 보였을 것이다.

죽음 전야

그날 저녁, 함내에서는 출격 전 마지막 의식 같은 장면이 이어졌다. PBS NOVA 인터뷰에 따르면 승조원들은 해가 지기 전 갑판에 집합해 황궁이 있는 방향을 향해 섰고, 전우들과 악수를 나누며 마지막 인사를 했다. 이어 군가를 불렀다. 그리고 자신들의 목숨이 얼마 남지 않았을지 모른다는 사실을 모두가 알아차린 채, 함내 창고와 팬트리가 열렸다. 술이 풀렸고, 사람들은 사케와 맥주를 나눠 마셨다.

이 장면이 강렬한 것은 영웅적이라서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한쪽에서는 국가가 강요한 의식이 진행되고, 다른 한쪽에서는 평범한 젊은이들이 죽음이 가까워졌다는 사실을 어떻게든 견디기 위해 술잔을 붙드는 모습이 겹친다. 누구는 군가를 불렀고, 누구는 취하도록 마셨고, 누구는 거의 마시지 못했다. 같은 갑판 위에 있었지만, 각자의 밤은 모두 달랐다.

죽음 전야의 술잔
1945년 4월 6일 밤, 출격을 앞둔 야마토 함내의 마지막 술자리를 재구성한 상상도. 군가와 건배가 이어졌지만, 그 밑바닥에는 모두가 알고 있던 공포와 체념이 깔려 있었다.

죽음으로 천천히

야마토는 그렇게 밤바다로 나갔다. 배는 일본 본토 연안을 따라 남쪽으로 움직였고, 아직 포성은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 항해는 출발한 순간부터 이미 고립돼 있었다. 미 해군 잠수함 해클백스레드핀은 4월 6일 저녁 분고 수로를 빠져나오는 일본 함대를 발견했고, 그 위치를 즉시 보고했다. 다음 날 아침에는 미군 정찰기와 항공모함 전단이 함대에 따라 붙었다.

야마토의 마지막 항해는 시작부터 비밀이 아니었다. 이 배는 1937년 건조를 시작할 때는 지붕과 그물과 판자로 가려졌지만, 1945년 마지막 출항 때는 더 이상 숨길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너무 크고, 너무 느리고, 너무 늦었기 때문이다. 야마토는 이제 결전을 기다리는 비밀 병기가 아니라, 이미 상대에게 정확히 위치를 들킨 채 죽으러 가는 배가 되어 있었다.

들켜버린 항해
1945년 4월 6일 밤, 이미 미군에게 위치가 노출된 채 남쪽 바다를 가르는 야마토의 마지막 항해를 재구성한 상상도. 거대한 함체는 여전히 위엄이 있지만, 이제 그것은 비밀 병기가 아니라 어디로 가는지 모두가 아는 느린 죽음의 배가 되어 있다.

다음 편은 바로 이 하루를 다룬다. 거대한 배는 어떻게 무너졌는가. 왜 미군은 야마토의 한쪽 측면만 집요하게 때렸는가. 그리고 마지막 순간, 제국의 상징이던 이름 아래서 무엇이 끝내 남았는가.

출처

이미지 출처

`images/wiki-commons_kamikaze_uss-kidd_okinawa_19450411.jpg`: [Wikimedia Commons – Kamikaze about to crash into USS Kidd (DD-661) off Okinawa, Japan, on 11 April 1945 (NH 75767)](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Kamikaze_about_to_crash_into_USS_Kidd_(DD-661)_off_Okinawa,_Japan,_on_11_April_1945_(NH_75767).jpg)

생성형 이미지: 본문에 사용한 생성형 이미지는 Google Gemini로 제작했다.

본문 출처

[U.S. Naval Institute / Naval History and Heritage Command – H-Gram 044: “Operation Heaven Number One” (Ten-ichi-go): The Death of Yamato, 7 April 1945](https://www.history.navy.mil/content/dam/nhhc/about-us/leadership/hgram_pdfs/H-Gram_044.pdf)

오키나와 상륙 이후 일본 해군의 대응, 천황의 질책 맥락, 텐고 작전의 성격, 4월 6~7일 기쿠스이 1호 공격 규모 확인

[U.S. Naval Aviation in the Pacific](https://www.history.navy.mil/content/dam/nhhc/research/histories/naval-aviation/USNavalAviationInthePacific/pacific.pdf)

1945년 4월 6일 오후 3시 20분 야마토 출항, 해클백/스레드핀의 접촉, 4월 7일 미군 항공기 투입 규모 확인

[PBS NOVA – Sinking the Supership transcript](https://www.pbs.org/wgbh/nova/transcripts/3212_supershi.html)

출격 전야 갑판 집합, 황궁 방향으로 선 승조원들, 팬트리 개방, 사케와 맥주가 풀린 분위기 확인

[NSA – COMINT and the Sinking of the Yamato](https://www.nsa.gov/portals/75/documents/news-features/declassified-documents/cryptologic-spectrum/comint_and_the_sinking.pdf)

야마토 함대의 이동이 미군에 어떻게 추적되고 있었는지, 최후의 항해가 이미 상대에게 읽히고 있었다는 점 보강

[Contributions to Naval History No. 10](https://www.history.navy.mil/content/dam/nhhc/research/publications/publication-508-pdf/USNavy-Innovation-book508.pdf)

1945년 4월 6~7일 첫 기쿠스이 공격에 투입된 355대의 가미카제기와 340대의 일반 공격기 수치 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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