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도의 상인들, 일본을 만들다 (8) – 연기, 결단, 해체

근대화의 그림자

벳시 동광의 근대화는 성공했다. 생산량은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그런데 생산이 늘어날수록, 굴뚝에서 나오는 것도 늘어났다.

아황산가스(SO₂).

구리를 제련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이 기체는, 대기 중의 수분과 결합하면 황산이 된다. 벳시 인근의 산과 논밭이 죽어가기 시작했다. 농작물이 말랐다. 산림이 민둥산으로 변했다. (벳시 아황산가스 피해 사진은 스미토모 아카이브에 있는데 배포가 불가능한 저작권이 걸려있다.)

생성형 이미지(Google Gemini). 벳시 연해가 남겼을 법한 디스토피아적 풍경

1893년, 농민들이 들고일어났다.

당시 일본에서는 두 건의 광산 공해 사건이 동시에 진행 중이었다. 도치기현 아시오 구리광산의 광독 오염이 그 하나, 에히메현 벳시의 연해(煙害)가 또 하나. “동쪽의 아시오 광독, 서쪽의 벳시 연해.”

아시오 광독 사건의 현장, 1895년경
메이지 시대 일본 최대의 공해 사건인 아시오 광독(광산 오염 피해를 뜻한다) 사건의 현장. “동쪽의 아시오, 서쪽의 벳시”라 불릴 만큼 두 광산은 근대 일본 산업화의 빛과 그늘을 함께 상징한다. ©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이바 테이고의 결단

히로세 사이헤이의 뒤를 이은 스미토모의 새 지도자는 이바 테이고(伊庭貞剛, 1847~1926)였다.

이바 테이고
스미토모 제2대 총리사 이바 테이고(1847~1926). 시사카지마 제련소 이전이라는 전례 없는 결단으로 벳시 공해 문제를 정면 돌파했다. 은퇴 후에는 선불교에 귀의했다. ⓒ Wikimedia Commons / Public Domain

오염에 의한 피해는 구체적이었다. 가네코(金子), 니하마(新居浜), 쇼나이(庄内), 신스카(新須賀) — 니하마 인근 4개 마을이 직격을 맞았다. 아황산가스는 채소밭을 태우고, 뽕나무를 죽이고, 쌀과 밀을 말렸다. 4년간 쌀·밀 피해액만 37만 엔. 연못 속 물고기가 죽고, 묘비의 이끼가 벗겨졌다. 에히메현 최고의 곡창지대가 천천히 무너지고 있었다.

생성형 이미지(Google Gemini). 제련소 굴뚝 연기로 황폐해진 니이하마 인근 농촌의 피해

1893년 9월, 농민들이 에히메현청으로 몰려갔다. 스미토모 측의 첫 반응은 “일종의 해충 피해”였다. 아황산가스가 원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피해는 눈으로 보였고, 분노는 멈추지 않았다.

1899년 태풍 때는 수십 년간 민둥산이 된 벳시 산지에서 대규모 산사태가 일어나 약 512명이 목숨을 잃었다. 나무가 없으니 흙이 버티지 못했다. 연기 피해와 벌목의 대가가 한꺼번에 쏟아진 것이다.

이바는 농민들의 분노와 여론의 압박 앞에서 가장 어려운 선택지를 골랐다.

“제련소를 아예 다른 곳으로 옮긴다.”

그런데 어디로? 가스가 퍼지지 않는 곳이어야 한다. 농지가 없어야 한다. 그렇다면 — 사람이 없는 무인도다.

이바가 선택한 곳은 에히메현 신이하마에서 약 20km 떨어진 바다 한가운데의 무인도, 시사카지마(四阪島)였다.

시사카지마의 위치
시사카지마는 일본 시코쿠 북쪽, 에히메현 니하마 앞바다에 있다. 일본 전역으로 보면 규슈와 혼슈 사이의 세토 내해 쪽에 해당한다. (지도를 보면 이바의 의도와 정반대로 가스가 퍼지기에 최적의 장소다. 결단은 훌륭했으나 한계가 분명했다.) © Google Maps
생성형 이미지(Google Gemini). 시사카지마 제련소 건설 초기를 상상해 만든 이미지. 아래 실제 사진과 꽤 유사하다.

무인도에 제련소를 짓는다. 건설 자재부터 노동자의 밥까지 모든 것을 배로 실어 날라야 한다. 물도, 전기도, 도로도 없는 곳에 산업 시설을 만드는 것. 당시로서는 천문학적 투자였다.

아황산가스를 회수하는 기술 자체가 당시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기술이 없으면 어떻게 해야 하나 — 가스가 닿는 곳에 아무것도 없으면 된다. 이바는 이 단순하고도 냉정한 논리를 극한까지 밀어붙였다. 거액의 인프라 투자, 수천 명의 이주, 기존 제련소 폐쇄 — 이 모든 걸 결단하는 데 얼마나 큰 압력을 이겨내야 했을지, 상상하기 어렵다.

사실이다. 그런데 조금 스미토모 편에 치우친 서술이다. 위에서 서술했다시피 스미토모는 처음엔 아황산가스로 인한 환경 오염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 조직은 기본적으로 이익집단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시사카지마(四阪島) — 바다 위의 제련소
에히메현 앞바다의 시사카지마 제련소. 1905년 스미토모가 벳시의 제련 공정을 이 무인도로 통째로 이전했다. © Wikimedia Commons / Public Domain

1905년 1월, 시사카지마 제련소가 가동을 시작했다.

그런데 — 기대와 달리, 연기는 더 넓게 퍼졌다. 완전한 해결책이 아니었다. 근본적인 해결은 20세기 들어 황산 회수 기술이 개발된 이후에야 이루어졌다.

그러나 결단 자체의 가치는 그대로다. 완벽하지 않았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그게 스미토모가 400년을 버텨온 방식이기도 하다.

이바는 다른 전선에서도 싸우고 있었다. 벳시의 산이었다. 수십 년간 숯을 대느라 베어낸 아카이시 산맥은 이미 민둥산이 되어 있었고, 제련소 가스까지 더해져 남은 나무마저 말라 죽어가고 있었다. 1894년 부임하자마자 이바는 조림 전문가를 고용하고 식수 계획을 세웠다. 연간 6만 그루이던 식수 규모는 1897년에 100만 그루를 넘겼다.

황폐해진 벳시 산과 조림 계획의 시작

지금 벳시 산의 울창한 숲은 그 결과다.

현재의 벳시 산
현재의 벳시 산 일대. 한때 민둥산으로 황폐해졌던 산지는 지금 다시 울창한 숲으로 덮여 있다. © Wikimedia Commons / Araiyasushige / CC BY-SA 4.0

스미토모 화학의 탄생 — 공해에서 산업으로

아황산가스는 황산의 원료이고, 황산은 비료의 원료다. 스미토모는 제련 공정에서 나오는 아황산가스를 비료로 바꾸는 공장을 직접 세웠다.

이것이 스미토모 화학(Sumitomo Chemical)의 시작이다. 1913년 설립. 공해의 원인을 산업으로 바꾼 것이다.

스미토모 화학의 출발점, 에히메 공장
스미토모 화학의 출발점은 에히메현 니이하마의 비료공장이었다. 벳시 제련소의 아황산가스를 비료 원료로 돌리려는 시도는 훗날 일본을 대표하는 종합 화학회사로 이어졌다. 사진은 스미토모 화학 공식 연혁에 실린 1926년 무렵 에히메 공장 관련 이미지. © Sumitomo Chemical

이 경로가 스미토모의 다각화 방식을 잘 보여준다. 새로운 시장을 눈여겨봐서 진출한 게 아니라, 광산이라는 거대한 공장에서 흘러나오는 기술·인력·부산물이 자연스럽게 새 산업을 만들었다. 스미토모 중공업도 1888년 벳시 광산의 기계 제작·수리 공장으로 출발했다. 광산 설비를 고치다 보니 기계 제조업자가 됐다.

벳시는 광산이었지만, 스미토모에게는 하나의 거대한 인큐베이터였다.

1945년 — 역사상 최대의 위기

스미토모 화학의 출발점은 1913년 니이하마에 세워진 독립 경영 비료공장이었다. 1915년 첫 비료 출하가 이뤄졌고, 1925년에는 스미토모 비료제조 주식회사로 법인화됐다. 이어 1934년 사명을 스미토모 화학으로 바꾸며 비료회사를 넘어 본격적인 화학회사로 자리를 굳혔다. 1944년에는 일본염료제조를 인수해 염료와 의약 분야로까지 손을 넓혔다. 다시 말해 스미토모 화학의 초기 역사는, 벳시의 연기 문제를 처리하기 위한 비료 사업에서 출발해 전전 일본의 중화학공업 체제 속으로 빠르게 편입되는 과정이었다.

그리고 1945년 8월, 일본은 2차대전에서 패전했다.

GHQ(연합군 최고사령부)의 재벌 해체 명령이 떨어졌다. 스미토모 본사(住友本社, Ltd.)는 해산 대상으로 지정됐다. 1937년 이전의 합자회사 체제를 주식회사형 본사 조직으로 재편해 유지해온, 재벌의 중앙 통제기구였다. 은행, 광산, 금속, 화학 등 핵심 계열사를 거느리던 이 본산이 무너지면, 스미토모라는 집합체 자체가 해체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스미토모 내부 자료는 이 시기를 “경영사상 최대의 위기“로 표현한다.

GHQ가 재벌 해체를 밀어붙인 이유는 단순했다. 재벌은 단지 돈 많은 기업집단이 아니라, 전쟁 수행을 가능하게 한 일본의 권력 구조 그 자체로 보였기 때문이다. 은행·광산·중공업·무역을 수직으로 거느린 소수 가문의 경제 지배를 끊어야, 일본을 군국주의 국가가 아닌 민주주의 국가로 다시 설계할 수 있다고 GHQ는 판단했다.(전전의 일본 재벌형태라면 몇 사람의 의지로 다시 전쟁을 일으킬 수 있으니 옳은 판단이었다고 볼 수 있다.)

1946년 스미토모 본사 해산식
1946년 스미토모 본사 옥상에서 열린 해산식. 사진 중앙 앞에서 세 번째 줄 가운데가 마지막 총리사 후루타 슌노스케다. 재벌 해체는 단순한 법적 조치가 아니라, 수백 년 이어진 집합체가 눈앞에서 풀리는 장면이었다. © Sumitomo Group Public Affairs Committee / Sumitomo Historical Archives

총리사(대표이사) 후루타 슌노스케(古田俊之助)는 GHQ 지시에 직면한 직후 한 가지 원칙을 세웠다.

“해체는 받아들인다. 그러나 사람과 사업의 연속성은 지킨다.”

후루타는 직원들의 일자리를 만들기 위해 상사(종합무역) 부문에 새로 진출하기로 했다. 1946년 1월, 전문 무역 경험이 없는 “32명의 비전문가 집단“이 새 출발을 했다. 그 32명이 훗날 수조 원 규모의 스미토모 상사(Sumitomo Corporation)가 됐다.

‘비전문가’란 무능하다는 뜻이 아니다. 이들은 전전의 종합상사맨이 아니라, 해체 직후 각 계열사에서 모인 내부 인력들이었다. 스미토모는 원래 광산, 금속, 은행, 제조업에는 강했지만, 패전 직후 새로 짜야 했던 무역 부문은 사실상 처음부터 배워야 했다. 그러니까 이 “32명의 비전문가”는, 전문성이 없던 사람들이 아니라 새로운 업종을 맨손으로 세우러 투입된 사람들에 가까웠다.

상사(商社)는 글자 그대로는 ‘상품을 다루는 회사’이며 ‘무역’의 이미지가 강하다. 그러나 일본 현대사에서의 상사는 단순 중개상을 뜻하지 않았다. 수출입, 금융, 선적, 보험, 정보 수집까지 묶어 처리하는 거래 플랫폼에 가까웠다. 한국도 1970년대 이후 종합상사 모델이 수출 드라이브의 핵심이 되었는데, 삼성물산·대우·현대종합상사가 대표적이다.
한국 종합상사의 성장
삼성물산 연혁 페이지에 실린 창업·성장기 사옥 사진. 1975년 삼성물산은 한국 최초의 종합상사 1호로 지정됐고, 이후 삼성물산·대우·현대종합상사 같은 한국형 종합상사들이 수출 드라이브의 핵심 인프라가 됐다. © Samsung C&T

1952년, 미군의 점령이 끝나고 ‘스미토모’라는 이름이 복귀됐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발효와 함께 점령체제가 종료되면서, 재벌 해체기 동안 걸려 있던 상호 사용 제한도 느슨해졌기 때문이다. 다만 예전의 단일 지주회사 재벌이 그대로 부활한 것은 아니었다. 전전의 스미토모가 하나의 본사를 중심으로 묶인 체제였다면, 전후의 스미토모는 독립한 여러 회사가 공통의 역사와 철학으로 연결된 느슨한 그룹으로 다시 태어났다.

전후에도 남은 스미토모의 이름과 문장
전후 스미토모가 되찾은 것은 옛 재벌 지주회사의 껍데기가 아니라, ‘스미토모’라는 이름과 이게타(井桁) 문장을 공유하는 느슨한 연합의 정체성이었다. 이미지는 스미토모 그룹 홍보위원회 공식 사이트 로고를 크롭해 사용했다. © Sumitomo Group Public Affairs Committee

출처

이미지 출처

– Google Maps, “四阪島” 지도 캡처 — https://www.google.com/maps/place/%E5%9B%9B%E9%98%AA%E5%B3%B6/

– Wikimedia Commons, “Ashio Copper Mine circa 1895.JPG” —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Ashio_Copper_Mine_circa_1895.JPG

– Wikimedia Commons, “IBA Teigo.jpg” —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IBA_Teigo.jpg

– Wikimedia Commons, “Sumitomo refinery at shisakajima.jpg” —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Sumitomo_refinery_at_shisakajima.jpg

– Wikimedia Commons, “Tounaru 20230526 1.jpg” —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Tounaru_20230526_1.jpg

– Sumitomo Chemical, “Company History” — https://www.sumitomo-chem.co.jp/english/company/history/

– Sumitomo Group Public Affairs Committee, “Shunnosuke Furuta, the last director-general” — https://www.sumitomo.gr.jp/english/history/history_tour/osaka_niihama_02/

– Samsung C&T, “History” — https://www.samsungcnt.com/about-us/history.do

– Sumitomo Group Public Affairs Committee, official site logo (cropped) — https://www.sumitomo.gr.jp/english/history/s_history/

– 생성형 보조 이미지 4점 — Google Gemini

본문 출처

– Sumitomo Chemical, “Company History” — https://www.sumitomo-chem.co.jp/english/company/history/

– Sumitomo Corporation, “100 Years of Sumitomo Corporation History” — https://www.sumitomocorp.com/-/media/Files/hq/about/library/ci01/100years_en.pdf

– Sumitomo Group Public Affairs Committee, “Shunnosuke Furuta, the last director-general” — https://www.sumitomo.gr.jp/english/history/history_tour/osaka_niihama_02/

– Sumitomo Group Public Affairs Committee, “After War, Rebirth” — https://www.sumitomo.gr.jp/english/history/s_history/

– Sumitomo Metal Mining, “Corporate History” — https://www.smm.co.jp/en/corp_info/story/history/

– Samsung C&T, “History” — https://www.samsungcnt.com/about-us/history.do

– Britannica Money, “Sumitomo Group” — https://www.britannica.com/money/Sumitomo-Group

– Wikipedia, “Sumitomo Group” — https://en.wikipedia.org/wiki/Sumitomo_Grou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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