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도의 상인들, 일본을 만들다 (7) – 논리가 칼을 이긴 날

177년의 평온

1691년 벳시 동광을 열고 난 뒤, 스미토모는 묵묵히 산을 팠다. 에도와 오사카의 상인들이 쌀 투기와 환율 변동에 베팅하며 벼락부자가 되고 또 하루아침에 몰락하는 동안에도, 스미토모는 요동치지 않았다. 깊은 산속에서 1만 명의 광산 공동체를 먹여 살리며, 쏟아지는 지하수와 싸우고 구리를 캐낼 뿐이었다.

그렇게 요령 피우지 않고 우직하게 광산을 지켜온 시간. 하지만 막부 말기라는 시대의 격랑은 이 깊은 산속 광산을 가만두지 않았다.

1865년, 두 통의 편지

히로세 사이헤이(広瀬宰平, 1828~1914)는 1865년, 서른일곱 살에 벳시 동광의 최고 책임자가 됐다.

그는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였다. 열 살도 채 안 된 어린 나이에 벳시 광산에 들어와, 광부들과 함께 먹고 자고 산을 팠다. 하급 직원에서 시작해 현장 감독으로, 다시 관리직으로 올라간 완전한 내부자. (내부 승진의 아주 좋은 예다) 그는 책상에서 광산을 이해한 게 아니라 갱 속에서 이해했다.

이렇게 갱을 배우면서 성장했을 것이다. 광산 공동체가 1만 명에 달했다고 하는데, 말단으로 들어가서 총지배인까지 됐으니 매우 유능한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런 그가 책임자가 된 첫해에 막부로부터 청천벽력 같은 통보를 받았다.

“광산 매입미(買い受け米)를 중단한다.”

매입미란 무엇인가? 당시 벳시 동광에는 1만 명이 넘는 광산 공동체가 살고 있었다. 광부, 제련공, 숯 굽는 사람, 운반부, 그 가족들. 이 모든 사람들의 식량을 안정적으로 공급하는 게 광산 운영의 전제조건이었다. 막부는 구리 생산을 유지하기 위해 막부령에서 거둔 쌀을 시세보다 싼 가격으로 광산에 공급해왔다. 이것이 매입미다. 한마디로 광산 공동체의 식량 보조금이었다.

왜 갑자기 끊었는가? 막부가 조슈(長州)번과 전쟁을 준비하면서 군량미가 부족해졌기 때문이다.

막부가 중단시킨 것은 식량(매입미)만이 아니었다. 그들은 ‘막부가 독점적으로 사들이는 구리’라는 뜻의 고요도(御用銅, 우리말로 어용동) 매입마저 폐지해 버렸다.

고요도란 막부가 지정한 공식 구리 수출 물량이다. 막부는 나가사키를 통해 네덜란드와 청나라에 구리를 팔았고, 이 구리를 스미토모가 독점으로 납품했다. 일종의 구리 전매 계약이었다. 이 루트가 막히면 스미토모의 수익 구조 자체가 흔들린다. 매입미 중단이 ‘밥줄 끊기’였다면, 고요도 폐지는 ‘팔 곳이 없어지는 것’이었다. 두 충격이 동시에 왔다.

고요도는 왜 폐지했는가? 일단 막부에 돈이 없었다. 당시 막부는 서양 열강의 압박, 조슈번과의 내전 등으로 무기와 함선을 사들이느라 천문학적인 돈을 쓰고 있었다. 게다가 1854년 미일화친조약 이후 요코하마, 하코다테 등 여러 항구가 강제로 개항되면서 외국인들과 일본 상인들의 직거래가 가능해졌다. 다른 물건들과 마찬가지로 구리 역시 나가사키를 통한 막부의 독점 무역이 무용지물이 됐다. 다시 히로세 얘기로 넘어가자.

히로세는 즉각 에도로 올라갔다. 몇 달에 걸친 협상 끝에 일부 매입미를 되살리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돌아온 쌀은 예전보다 훨씬 비쌌다. 광산은 “겨우 숨만 이어간 상태”로 유지됐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 다음은 메이지 유신이었다.


토바-후시미의 포성 — 시대가 뒤집어지다

1868년 1월, 교토 외곽 토바와 후시미에서 포성이 울렸다. 신정부군과 막부군의 충돌이었다.

토바-후시미 전투 (1868년)
1868년 토바-후시미 전투를 묘사한 우키요에. 신정부군의 압도적 화력 앞에 막부군이 무너지는 장면을 담았다. ⓒ Wikimedia Commons / Public Domain

병력으로 보면 막부군이 훨씬 많았다. 그런데 결과는 막부의 완패였다. 최신식 소총과 암스트롱 포를 갖춘 신정부군 앞에 칼과 구식 화승총의 막부군은 상대가 안 됐다. 전투 기술의 격차가 아니라 무기 체계 자체의 세대 차이였다.

승기를 잡은 신정부군은 구 막부 시대 특권 상인들의 자산을 적산(敵産)으로 간주하여 몰수하려 했다. 그중에서도 무기의 원료인 구리를 뿜어내는 벳시 동광은 최우선 표적이었다.

여담이지만 일제 강점기 시절 일본인들이 한국에 지은 집들도 적산가옥이라고 한다. 목포나 군산 등 항구도시에 꽤 많았다. 적의 재산이라는 뜻인데 그 말도 적의 말에서 왔다.
“벳시 동광을 접수하라.”

스미토모의 심장에 칼이 들어왔다.


히로세 사이헤이, 혼자 마주 앉다

신정부가 파견한 접수 위원은 도사번 출신 무사 가와다 고이치로(川田小一郎, 1836~1896)였다.

가와다 고이치로 — 일본은행의 교황
벳시 동광 접수 위원으로 파견됐다가 히로세의 논리에 설득된 가와다 고이치로. 훗날 제3대 일본은행 총재가 됐다. 이 남자는 사무라이 출신이고 인상이 보통이 아니다. 가와다와 마주 앉아 담판을 지은 히로세도 보통 사람이 아니다. 퍼블릭 도메인 / 하쿠분칸, Wikimedia Commons
히로세 사이헤이 — 스미토모의 심장을 지킨 남자
스미토모 총지배인 히로세 사이헤이(1828~1914). 9세에 벳시 광산에 입사하여 평생을 현장에서 보낸 그는 메이지 유신의 격랑 속에서 담판 하나로 스미토모를 구했다. ⓒ Wikimedia Commons / Public Domain

두 사람이 마주 앉았다.

히로세는 애원하지 않았다. 뇌물을 들이밀지도 않았다. 그는 논리로 가와다를 압박했다.


담판의 논리 — “국가의 손실이 될 것입니다”

“비록 유신이 되었다고는 하나, 신정부가 이를 몰수하여 경험이 없는 자에게 맡기게 된다면 결과는 불을 보듯 뻔한 일입니다. 동광 경영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며, 이익은커녕 국가에 큰 손실이 될 것입니다.

“이제부터 우리나라는 구미 제국을 따라잡고 어깨를 나란히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스미토모의 구리가 없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 두 문장에는 두 개의 승부수가 담겨 있었다.

첫 번째 승부수: 대체 불가능한 기술력. 벳시 동광은 단순한 구멍 파는 곳이 아니다. 수백 미터 지하 갱도의 용수 처리, 산림 순환 조림, 제련 공정 — 이 모든 것은 수십 년 현장 경험이 없으면 다룰 수 없다. 무지한 관료가 잘못 건드리면 광산 전체가 물에 잠긴다. 그것은 영구적인 국부의 손실이다.

두 번째 승부수: 국가 전략 자원. 서양 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하려면 철강, 조선, 무기가 필요하다. 그 모든 것의 기반이 구리다.

히로세는 “내 것을 빼앗지 마라”고 하지 않았다. “이걸 빼앗으면 일본이 손해“라고 했다. 그 프레임 전환이 담판의 승패를 갈랐다.

히로세와 가와다

가와다와 히로세, 두 거인이 빚은 결실

가와다는 히로세의 논리가 맞다는 것을 간파하고 즉각 접수 계획을 철회했다. 스미토모가 계속 벳시 동광을 경영하는 결정을 내렸다. 히로세의 말처럼 신정부가 벳시를 가져갔다면 스미토모 만큼 잘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여기서 스미토모의 기업 문화가 얼마나 잘 이어져 내려왔는지 짚어보자. 스미토모 마사토모는 1652년 세상을 떠났고, 히로세와 가와다의 담판은 1868년으로 무려 216년의 간격이 있었다. 히로세가 신정부의 관료들에게 뇌물을 주거나 정치적 줄타기를 하지 않고, 공사일여의 정신으로 “이 광산의 자원과 기술은 국가의 것”이라는 정공법으로 돌파했다. 스미토모의 철학이 그대로 이어져 왔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가와다 역시 훌륭한 인물이었다. 칼을 들고 왔다가 논리에 설득되어 칼을 내려놓는 것 — 그게 쉬운 일이 아니다.


스미토모와 근대화의 시작

경영권을 지켜낸 히로세는 바로 다음 단계로 넘어갔다.

1874년, 프랑스인 광산 기사 루이 라로크(Louis Larocque)가 벳시에 초빙됐다. 다이너마이트 발파 기법이 도입됐고, 스미토모 직원들이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다.

1893년 구리 광산 발파 굴착 현장
1893년경 영국 콘월 쿡스 키친 구리 광산. 발파를 위해 암반에 구멍을 뚫는 광부들의 모습. 다이너마이트 발파는 이처럼 착암기로 구멍을 뚫은 뒤 화약을 장전하고 폭파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퍼블릭 도메인 / Rijksmuseum, Wikimedia Commons
왜 프랑스였을까? 18세기 이후 유럽에서 광산 공학이 가장 발달한 나라는 프랑스였다. 1783년 파리에 설립된 에콜 데 민(École des Mines)은 세계 최초의 광업 전문 고등교육기관이었다. 영국이 방직과 증기기관에서 앞서나갔다면, 프랑스는 지하 자원 채굴의 체계화에서 앞서갔다.

그리고 1893년. 험준한 아카이시 산맥 속에 스미토모 벳시 광산 철도가 놓였다. 산 속에 철도를 깔다. 21세기에도 쉬운 일이 아닌데, 1893년에 해냈다.

벳시 동광 철도 1형 증기기관차
에히메현 니이하마시 마인토피아 벳시 기념관에 전시된 벳시 동광 철도 1형 증기기관차. 1893년 개통 당시 투입된 기관차로, 준 철도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 Lumi iori / Wikimedia Commons CC BY-SA 4.0

미노무라와 히로세 — 미쓰이와 스미토모를 구한 영웅

이 시기 스미토모의 히로세 사이헤이와 비교되는 인물이 미쓰이 재벌을 구한 미노무라 리자에몬(三野村利左衛門, 1821~1877)이다. (미노무라의 자세한 이야기는 미쓰이 편에서 다뤘다)

두 사람 모두 메이지 유신이라는 같은 격변 속에서 각자의 재벌을 구해냈다. 그러나 방식이 달랐다.

미노무라는 막부의 요구를 외교적 협상과 재무 기술로 150만 냥에서 18만 냥으로 깎아냈고, 유신 직후 새 권력에 즉각 베팅을 전환했다. 유연성과 금융 감각이 그의 무기였다.

히로세는 칼을 든 관료 앞에서 “이 광산은 국가 인프라다”라는 논리로 정면 돌파했다. 현장 지식과 거시 논리가 그의 무기였다. (미노무라도 훌륭한 경영인이었지만 개인적으로 히로세에게 더 호감이 간다.)

미노무라와 히로세

다음 편에서는 공해와 패전을 마주한 스미토모의 도전을 다룬다.


출처

– Wikipedia, “広瀬宰平 (Hirose Saihei)” — https://ja.wikipedia.org/wiki/広瀬宰平

– Sumitomo Metal Mining, “The History of Sumitomo Metal Mining” — https://www.smm.co.jp/en/corp_info/story/01/

– Wikipedia, “Battle of Toba–Fushimi” —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Toba%E2%80%93Fushimi

– Sumitomo Corporation, “Sumitomo History” — https://www.sumitomocorp.com/en/us/about/company/sc-history/h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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