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도의 상인들, 일본을 만들다 (6) — 산을 삼킨 장사꾼

비밀을 공개하다

은이 섞인 구리에서 순수한 은만 뽑아내는 기술, ‘남만불기(南蛮吹き)’. 이 독점 기술을 완성한 스미토모 가문 앞에는 거대한 부가 약속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들은 기로에 섰다.

이 기술을 비밀로 지켜 독점할 것인가, 아니면 공개할 것인가.

상식적으로는 당연히 비밀이다. 막대한 부의 원천이니까. 그런데 리에몬의 아들이자 스미토모 가문으로 입적한 도모모치(友以, 1607~1662)는 놀랍게도 정반대의 선택을 했다. 다른 구리 제련업자들에게 기꺼이 기술을 공개한 것이다.

이게 천재적인 이유는, 기술을 준 대가로 기술을 전수받은 제련업자들 전체가 스미토모를 중심으로 결속됐기 때문이다. 스미토모는 제련업자들의 우두머리, 즉 “남만불기의 종가(宗家)”가 됐다. 원자재 유통과 구리 수출의 기준을 설정하고, 금융 · 환전까지 쥐는 룰 메이커(Rule Maker). 단기적 독점 이윤을 포기하는 대신 산업 생태계 전체를 지배하는 지위를 택한 것이다.

기술이 진짜 가치를 갖는 건 독점할 때가 아니라 표준이 될 때라는 걸, 300년 전 이 사람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 결과 오사카(大阪)는 일본 구리 제련과 수출의 중심지로 부상했고, 스미토모는 에도 시대 일본 상업 경제의 혈맥을 쥐게 됐다.


운명의 광맥 – 벳시 동광

그러나 스미토모를 진짜 산업 자본으로 바꾼 사건은 따로 있었다.

1690년, 에히메현(愛媛県) 아카이시 산맥 남쪽 사면(이쪽 산간 지역을 ‘벳시’라고 부른다).

에히메현 인근 다쓰카와 동광의 십장(한국에선 여전히 비하적인 의미로 쓰이는 단어인데, 일본어에서 왔다)이던 기리바 초베이가 산을 오르다 광맥의 노두(露頭)를 발견했다.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노두란 땅속의 광맥이 지표면에 고개를 내민 지점이다. 암벽의 절개면이나 계곡 벽면에서 유독 빛나거나 색이 다른 암석층이 드러나는 것을 보고 광부들은 그 아래 광맥을 짐작한다. 말하자면 광산의 현관문이다.

스미토모의 관리인 타무케 주에몬이 현장을 확인했고, 이듬해인 1691년 스미토모는 에도 막부에 채굴권을 신청해 일정한 운조(運上, 로열티)를 납부하는 조건으로 채굴을 개시했다.

에히메현 벳시 동광 전경
에히메현 아카이시 산맥의 벳시 동광. 험준한 산악 지대에 위치한 이 광산은 1691년부터 1973년까지 283년간 가동됐으며, 총 65만 톤의 구리를 생산했다. ⓒ Wikimedia Commons / CC BY-SA

이 산과 아래 묻혀있는 구리는 스미토모 것이 아니었다. 당시 일본에서 지하 광물 자원의 소유권은 막부(국가)에 있었다. 민간 기업은 채굴권(採掘権)만을 얻을 수 있었고, 그 대가로 캐낸 광석의 일정 비율을 운조로 납부해야 했다. 메이지 유신 이후에도 1890년 광업법이 제정되어 광물 자원은 여전히 국가 소유로 규정됐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광물은 예나 지금이나 국가 기반 시설의 건설, 군수품 제작의 필수가 되기 때문에 ‘국가 자원’이다.


캐고, 녹이고, 팔았다

벳시 동광의 발견 이후, 스미토모는 단순한 구리 유통업자에서 전혀 다른 존재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현대 경영학에서 등장한 일종의 수직 계열화(垂直的統合, Vertical Integration)를 300년 전에 실현했다.

수직 계열화란 하나의 기업이 원자재 채굴부터 가공, 유통, 판매까지 공급망의 여러 단계를 직접 통제하는 전략이다. 우리나라에도 친숙한 방식이다. 포스코(POSCO)가 철광석 광산을 직접 운영하고, 철강을 만들고, 자동차·조선용 강판을 납품하는 게 수직 계열화다. 삼성전자가 반도체 원료부터 메모리 생산, 스마트폰 조립까지 직접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스미토모의 수직 계열화는 이렇게 됐다:

벳시에서 구리 원광을 캔다 → 오사카로 운반해 남만불기로 제련한다 → 나가사키를 통해 고순도 구리를 수출한다 → 추출된 은으로 명주를 수입해 환전업(금융)을 한다.

원자재 채굴, 가공, 수출, 금융까지. 모두 스미토모가 장악했다. 상인은 값싸게 사서 비싸게 파는 존재지만, 스미토모는 스스로 만들어서 스스로 팔았다. 스미토모는 당시 보통의 상인의 수준을 아득히 뛰어넘어, 에도 시대 최대의 ‘제조업자’이자 거대한 ‘산업 자본’으로 진화했다.


벳시, 아낌없이 쏟아내다

1698년, 벳시 동광의 연간 구리 생산량은 1,521톤에 달했다. 당시 유럽 전체를 통틀어 이 규모와 견줄 수 있는 단일 광산은 없었다. 에도 시대 일본 산속의 광산 하나가, 막 산업혁명을 준비하던 유럽을 압도하고 있었다. (18세기 초 산업혁명에 진입한 영국 전체의 연간 구리 생산량이 1만 톤에 못 미쳤다) 연구에 따르면 17~18세기 일본은 전 세계 구리 수출량의 20~30%를 차지했다.

하나 더 재미있는 계산을 해보자. 벳시는 1691년부터 1973년까지 283년간 가동되면서 총 65만 톤의 구리를 생산했다. 뉴욕의 자유의 여신상에 들어간 구리의 양이 약 80톤이라고 한다. 만약 65만 톤을 전부 자유의 여신상을 만드는 데 쓴다면 8,125개(…)를 만들 수 있는 양이다.


벳시가 남긴 숙제

그러나 1698년 최고 생산량을 찍은 직후부터, 벳시 동광은 혹독한 물리적 현실에 부딪혔다. 갱도가 깊어질수록 지하수가 쏟아져 들어왔다. 채굴 현장이 물에 잠기면 모든 게 끝이다.

동시에 구리를 제련하려면 막대한 양의 나무와 숯이 필요했다. 험준한 아카이시 산맥을 넘어 숯을 공급하는 물류비용은 생산이 늘수록 함께 치솟았다.

스미토모는 지하수 문제는 돌파했다. 수동 펌프에서 시작해 막대한 지하수를 퍼낼만큼 정교하고 복잡한 기계 장치를 만들어냈다. 이 과정에서 스미토모는 기계를 다루는 엔지니어 집단도 키워냈다. 이는 훗날 스미토모 중공업의 씨앗이 됐다.

그러나 숯 문제는 달랐다. 뾰족한 수가 없었다. 스미토모는 아카이시 산맥의 나무를 베고, 또 베었다. 벳시의 산은 수십 년에 걸쳐 조금씩 민둥산이 되어갔다. (그 청구서는 훗날 메이지 시대에 날아온다. 혹독하게.)

벳시 동광 동평 지구 산업 유적
에히메현 니이하마시, 벳시 동광 동평(東平) 지구의 석조 산업 유적. 1916년부터 1930년까지 채굴 본부로 사용되던 시설의 흔적이 지금도 남아 있다. ‘동양의 마추픽추’로 불린다. ⓒ Araiyasushige / Wikimedia Commons CC BY-SA 4.0

스미토모는 어떻게 이 험한 산 속에서 수백 년을 버텼을까? 기술도 있었고, 자본도 있었다. 그런데 그것만으로는 설명이 안 되는 부분이 있다. 지하수가 차오르는 갱도 안에서도, 예상치 못한 위기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은 것 — 그건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태도의 문제였다. 그 답은 광산이 발견되기 한참 전에 돌아가신 창업주 마사토모가 이미 심어두었다.


위기를 극복하게 한 마사토모의 유언

이 광산 경영의 철학적 토대는 스미토모 마사토모(1585~1652)가 생전에 남긴 가훈 『문수원시가(文殊院旨意書)』에서 왔다.

승려 생활을 거쳐 환속한 마사토모는 상업의 윤리를 불교적 사유와 결합시켰다. 이 가훈의 핵심은 세 가지다.

① 정성과 신용 (入精) “사업뿐 아니라 모든 상황에서 감사의 마음으로 최선을 다하라.”

② 부리추구 금지 (浮利を追わず) “쉽고 불확실한 이익, 즉 투기와 일확천금을 쫓지 말라. 확실하고 견실한 경영을 하라.”

③ 공사일여(公私一如) / 자리이타 (自利利他) “나와 남을 함께 이롭게 하라. 사적 이익과 공적 이익은 하나다.”

(불자로서 보건대 모든 부분에서 부처님 가르침과 맞아떨어지는 원칙이다.)

당시 에도의 상인들은 쌀 시세나 환율에 베팅해 하루아침에 떼돈을 버는 ‘투기’에 열을 올렸다. 하지만 광산은 달랐다. 갱도를 파고 물을 빼며 수십 년을 쏟아부어야 비로소 이익이 나는, 지독하게 무겁고 느린 산업이다. ‘눈앞의 얄팍한 이익(부리)을 쫓지 말라’는 마사토모의 가르침이 없었다면, 스미토모 역시 중간에 벳시 동광을 포기하고 쉬운 투기판으로 뛰어들었을지도 모른다. (미쓰이 편에서 다룬 미노무라는 이런 일도 많이 했던 것 같다…) 스미토모는 그 유혹을 가훈으로 막았다.

광산은 이 철학에 완벽하게 부합하는 산업이었다. 광산은 이동할 수 없다. 문제가 생겨도 달아날 수 없고, 해결책은 반드시 그 자리에서 찾아야 한다. 사회와 장기적으로 공존해야 하고, 수백 명의 노동자를 안전하게 통솔해야 하며, 자연에 대한 외경심이 없으면 산에서 사업을 할 수 없다.

철학과 산업이 맞아떨어졌을 때, 기업은 흔들리지 않는다.

다음 편은 메이지 시대와 함께 찾아온 스미토모의 위기와 극복을 알아본다.


출처

Sumitomo Metal Mining, “Corporate History” — https://www.smm.co.jp/en/corp_info/story/history/

Sumitomo Corporation, “100 Years of Sumitomo Corporation History” — https://www.sumitomocorp.com/-/media/Files/hq/about/library/ci01/100years_en.pdf

Britannica Money, “Sumitomo Group” — https://www.britannica.com/money/Sumitomo-Group

Wikipedia, “Besshi Copper Mine” — https://en.wikipedia.org/wiki/Besshi_copper_m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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